생각해 보면 정철은 무심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는 강아라는 이름조차도 잊었는지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처럼 기약 없이 기다리게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 왜장에게 가자! 그래도 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서 1년 가까이 정을 흠뻑 받지 않았는가. 그것이면 족하다. 그것이면 족한 게야.’ 이렇게 중얼거리며 돌아선 강아는 평양성을 바라고 휘적휘적 걷기 시작했다. --- 「제1부 조선을 사랑한 죄 - 강아 편」 중에서
“좋다. 네 소원을 들어 줄 터이니 다시는 부질없는 짓 말거라.” 마침내 조위가 여인의 옥수를 이끌어 옆에 다가앉힌 다음 옷을 벗고 촛불을 껐다. 조위가 감히 궁녀를 사사로이 범하고 있었건만 성종 임금은 조금도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위의 착한 마음씨가 성종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곧 환궁한 임금은 내시를 시켜 자신이 덮는 비단 이불을 두 사람이 잠든 사이에 몰래 덮어주게 하였다. --- 「제2부 어사에게 미인계를 쓰다 - 조위·신종호 편」 중에서
청루를 나선 홍순언은 밤거리를 휘적휘적 걸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사람 된 도리를 두 번이나 어겼구나. 아내를 두고 외국에서 불륜을 저지르려 하였으니 첫 번째 죄요, 귀한 돈을 명나라 여자에게 줘 버렸으니 나라에 불충한 죄로다. 이 일로 내 일신이 편치 않겠구나. 허나 꽃다운 여자의 정절을 구했으며, 부모에게 효도하려는 착한 마음을 구했으니 이 또한 의로운 일 아닌가. 이것이 죄가 된다면 그냥 죗값을 받기로 하자.” 이렇게 중얼거리며 숙소에 이른 홍순언은 실로 오랜만에 깊고 단 잠에 빠져들었다. --- 「제2부 역관 천하를 얻다 - 홍순언 편」 중에서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자를 다른 사람도 아닌 친아버지에게 빼앗기고 나서 서산군 혜가 겪어야 했을 정신적 공황을 좀처럼 가늠해 볼 길이 없다. 자식 잘되기만 바라며 한평생 사는 것이 부모 마음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것을 잘 알기에 자식들은 부모만 생각하면 가슴이 메고 코끝이 시큰하다. 그런데 아버지가 자식의 여자를 빼앗아 버렸다니! 실록에 실린 이야기니 세상에 어찌 그런 일이 있겠느냐고 반문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렇다. 이 충격적인 이야기는 우리 역사에 선명하게 남은 사실이다. 왕권을 포기함으로써 목숨을 부지하고, 자유로운 삶을 얻고자 기행을 택한 양녕 대군은 대체 무슨 마음으로 아들 혜의 여자를 취했던 것일까. --- 「제3부 왕실자손, 불륜으로 지다 - 서산군·구지 편」 중에서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공민왕은 느닷없이 대관의 아들 중 나이 젊고 얼굴 아름다운 자를 10여 명 뽑아 자제위子弟衛라 칭하였다. 바야흐로 공민왕의 기행이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자제위로 말미암아 후궁의 불륜이라는 치욕스러운 역사가 만들어졌고, 왕 자신의 생명 또한 꺾이고 말았으니 말이다. 자제위 중에는 임금의 좌우에서 항상 모시는 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일러 두리속고적頭裏速古赤이라 하였고, 두리속고적은 물론이고 자제위 전체를 총괄한 사람은 김흥경金興慶이었다. 그는 두리속고적과 마찬가지로 임금 근처에 늘 머물렀다.
겉만 보고 한국인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 복잡하고 불가사의한 한국인의 내면을 알고 나서야 우리 역사 속의 한국인의 참모습을 알게 될 것이다. 검은 암탉이 하얀 알을 낳고, 검은 소가 흰 우유를 쏟아내듯이 이은식李垠植 님의 책은 오늘날같이 혼탁한 세상에 샘물 같은 그런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어령李御寧 (초대 문화부 장관, 중앙일보 상임고문)
이은식 님이 쓴 「우리가 몰랐던 인물 한국사」는 얼핏 보면 평범한 또 한 권의 역사 기행문 같지만 이 책은 단순한 기행문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땅과 그 땅에 살았던 인간의 흔적을 복원해 내고 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역사가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현재요 미래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만열李萬烈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역임)
이은식 님의 「우리가 몰랐던 인물 한국사」는 일일이 현장을 답사하여 고증을 거친 작품으로 방대한 원고 속에 역시 방대한 역사 인물들이 등장하는 대작이다. 존경하는 인물의 90%를 외국인이 차지하는 이 세태에, 민족과 역사의 정체성이 빛을 잃어가는 이 시대에 가히 법고창신의 교과서가 될 만한 인물이 망라되고 있음은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다. 윤덕홍尹德弘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