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어느 날 오후, 점심식사를 마친 남편은 나와 헤어지고 싶다고 했다. 남편은 식탁을 치우면서 내게 그 사실을 통보했다. --- p.7
내면에 자리 잡은 위기감은 사라지지 않고 날로 커져만 갔다. 두 아이에 대한 부담이 지속적인 불안감으로 변했다. 아이들에 대한 책임감뿐 아니라 아이들을 돌보는 데 필요한 금전적인 문제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할까봐 불안했다. 지치거나 정신을 놓고 있다가 아이들을 다치게 할까봐 두렵기까지 했다. --- p.44
오늘에 충실하자. 퇴보하지 말자. 포기하지 말자. 힘을 내자. 무의미하고 악의적이고 분노에 가득 찬 독백은 그만두자. 과도한 감정 표현도 금물이다. 그는 떠났지만 나는 이곳에 남아야 한다. 이제는 그의 반짝이는 눈빛도 다정한 말투도 즐기지 못하겠지.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방어 태세를 갖추고 본연의 모습을 잃지 말자. 하찮은 장식품처럼 망가질 수는 없다. 나는 장식품이 아니다. 여자는 장식품이 아니다. --- p.105
나는 버림받고 혼자가 됐다고 무너져 내리거나 미쳐버리거나 목숨을 버리는 그런 여자가 아니다. 조금 망가지기는 했지만 나는 괜찮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온전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누구든 내게 상처를 주려 한다면 나는 그대로 되갚아줄 것이다. 나는 스페이드의 여왕이다. 나는 독침을 품은 말벌이다. 나는 시꺼먼 뱀이다. 나는 불 위를 걸어도 타죽지 않는 불멸의 생명체다. --- p.143
“아니. 이제 나는 공허함이 뭔지 알아. 그곳에서 다시 표면으로 떠오르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알고. 당신은 아니야. 당신은 몰라. 당신은 고작 공허함의 심연 속을 들여다봤을 뿐이야. 그러고는 겁이 나서 그 구멍을 카를라의 몸으로 막은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