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종양에 걸린 시각장애인, 부모에게 버려지고 첫사랑도 잃은 겜블러. 극단적 인물을 이해해낸다면, 보편적인 인물은 이해하기가 더 쉽지 않을까? 세상사가 그런 것처럼. 나는 쓰기를 작심했다. 원작을 뛰어넘고 말고는 관심 밖이었다. 이들의 처지를 온몸으로 공감하는 게 목적이었다. 이후, 작품을 쓰는 내내 나는 스토리를 만드는 것보다 내 가치관과 싸우는 게 더 힘이 들었다. 극의 갈등은, 극단적으로 흘러야 긴장감이 도는데, 그 당위를 찾는 과정은 진흙탕 싸움 같았다.
그냥 지가 죽지, 왜 남의 돈을 노리고, 사기를 쳐! 뇌종양에 걸려도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지, 왜 죽음을 생각해! 왜 저만 아파, 얘들은 신문도 뉴스도 안 보나, 왜 지들 문제에만 코가 빠져 있나! 사랑하면 그냥 사랑하지, 대체 뭐가 문제라 괴로워!
그러다 실오라기를 발견하듯 찾아낸 건 내 지난 청춘의 시간이었다. 나는, 그때 분명 나만 아팠다. 엄마가 생계에 나자빠져도 나는 당장 친구들과 술 한잔할 돈이, 골방에서 필 담뱃값이 필요했다. 나는 그때 뭐든 극단적이었고, 그래서 내 삶은 드라마틱했다. 가출, 끝없는 죽음에 대한 유혹과 때론 시도, 사랑을 농락하고, 기만하고, 그래서 나도 다치고, 상대도 다치고, 상처만 가득했던 시간들. 극단적이고 드라마틱한 인생을 나 자신도 살아낸 것이다. 만약, 그 시간이 나에게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결코 없었으리라. 그렇게,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내가 끝없이 얘기를 나눠야만 한 줄이라도 쓸 수 있었다.--- 『작가의 말』
씬15. 영이의 병실 안, 밤.
영, 눈 뜨고, 누워 있고,
수, 노크하고, 문 열고, 영이 침대 앞의 의자에 앉는, 맘 아프게 보는,
오 영 : (서글픈, 차분한) 떠난다며.. 떠나지, 왜 안 떠났어?
오 수 : ..
오 영 : 앞이 보이는 너희들은... 떠난단 말이 늘 무기지. 앞 못 보는 내가 혼자 남아, 어떤 생각을 할진 상관없지, 너희들은.
오 수 : ..
오 영 : 의사가.. 뭐래?
오 수 : (차마 말을 못 하는, 눈물이 나지만, 일부러 담백하고 가볍게 말하는) 재발.. 됐대.
오 영 : (가슴이 쿵 하지만, 짐짓 가볍게) 내.. 예상이 맞았네.
오 수 : 수술하면 된대.
오 영 : (슬픔이 밀려오는, 담담하게 말하지만, 잘 안 되는) 6살 때도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어. 수 술만 하면 돼. 항암치료 20번이면 돼. 다시 재발만 안 되면 돼. 말은 참 쉬워.
오 수 : (맘 아픈) 영이야.. 안 괜찮아도 되니까.. 울래?
오 영 : (눈가 붉은, 담담한) 아니, 별로.
오 수 : (맘 아픈, 영이 뒤로 가, 누워, 안아주는)
오 영 : (그제야, 조금씩 흐느끼다, 엉엉 우는)
오 수 : (눈물이 흐르는, 소릴 안내려 애쓰는, 안아주는)
그때, 희선, 진성, 문 열고, 그 모습 보다, 맘 아픈, 문을 닫아주는,
--- 「10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