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장의 사진: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논리 / 강의혁
첫 번째 사진: 케빈 카터의 「독수리와 소녀」
1994년 퓰리처상 수상작이자 사진작가 카터(Kevin Carter)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이끈 사진으로 널리 알려진 「독수리와 소녀」(The Vulture and the Little Girl) 사진은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우선 이 사진은 당시 수단의 기근이 수없이 많은 사람을 기아와 갈증으로 내몰던 현실을 국제사회에 알려 아프리카 아이들이 겪는 비참함에 대한 휴머니즘적인 반응을 이끌었지만, 동시에 많은 이들은 아사(餓死) 직전의 아이와 ‘인간 사냥’을 기다리는 독수리를 찍고 있는 작가에게 ‘왜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대신 사진 셔터를 누르고 있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카터의 손을 들어준 사람들은 고통의 이미지를 통해 그 고통에 대한 인간적 개입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포토저널리즘(photojournalism)의 논리에 동감하는 편이었고, 카터를 비난하는 이들은 사진의 프레임 밖에 있는 ‘사진작가의 위치,’ 정확하게는 사진작가가 사진의 피사체에 대하여 가지는 객관적, 관찰자적, 그리고 심하게는 방관자적 위치를 지적하며 포토저널리즘의 윤리성에 문제를 제기했다.
물론 이런 문제적 사진을 읽는 과정에서 그 논쟁에 관련된 윤리적, 정치적, 미학적 논리를 살펴보고 우리의 입장을 만들어나가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 사진을 읽는 또 하나의 방법은 어느 한편의 논리를 따르기보다는 왜 이런 논쟁이 제기되었는가를 맥락화 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통해 우리 자신의 위치를 되돌아보는 것이다. 하나의 문화적 사건이 팽팽하게 맞부딪히는 논리적 충돌, 즉 이율배반(antinomy)라는 교착상태(deadlock)로 이어질 때, 이를 이해하는 방식 중의 하나는 이 사건을 배태한 역사적 모순(contradiction)을 이해하고 이를 우리의 상황을 비추는 거울로 삼는 것이 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카터의 사진에 대한 논쟁은 그 사진이 속한 장르, 즉 포토저널리즘에 대한 역사적 비판과 무관하지 않다. 고통을 사진으로 옮길 때의 포토저널리즘의 논리는 바로 우리의 평온한 일상과는 다른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고발이며, 더 나아가 이런 열악한 현실에 대한 인간적 공감과 적극적인 대책을 촉구하는 인정에의 호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포토저널리즘의 긍정적인 정치성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관점을 달리한다면 우리는 ‘고통의 전시’라는 사진의 정치학이 가져온 역효과를 목도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폭력의 가시화, 폭력의 전시, 폭력의 스펙터클이며 더 나아가 끊임없이 더 자극적인 폭력과 더 충격적인 고통을 통해 상업적인 효과를 노리는 포토저널리즘의 이면이다. 또한 이런 포토저널리즘의 논리는 소위 상업영화의 ‘폭력 미학’과도 무관하지 않다. 즉, 폭력을 소재로 한 거의 모든 영화는 그 바탕에 휴머니즘적인 목소리를 깔고 있으며, 이를 역으로 말하면 휴머니즘은 이미 한낱 클리세(cliche)에 지나지 않게 되었으며 오히려 얄팍한 휴머니즘에 기대 끊임없이 새로운 ‘폭력 미학’을 보여주는 것이 소위 블록버스터(blockbuster)의 관행이 된지 이미 오래라는 이야기다.
이런 이유로 고통을 전시하는 많은 다큐멘터리적 사진을 두고 앨런 세큘러(Allen Sekula)는 “인간의 비참함을 ‘직접적으로’ 재현하는 포르노그래피”라는 가차 없는 비판을 가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비판의 근거는 바로 지금의 사회가 이미지의 홍수로 과부하 되어 있으며 끊임없이 ‘더’ 충격적인 이미지의 생산을 통해 이윤을 추구하는 문화산업의 논리가 이미 우리 삶의 풍경에 녹아든지 오래라는 것이다. 물론 기 드보르(Guy Debord)라 ‘스펙터클의 사회’라고 지적했던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숨겨진 부정의(不正義)의 모습들, 조직적으로 은폐되는 억압적 상황들, 그리고 우리의 일상문화에서 잘 보이지 않는 가난과 고통의 현장들을 알리고 이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일은 정말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이미 상업화되고 자극적으로 재편된 문화적 조건 하에서 정작 고통과 부정의의 폭로도 지극히 상업적으로 조작된 이미지와 구분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에서 자주 논의된 것처럼 진실과 거짓, 원본과 복제, 독창성과 차용(appropriation)의 구분이 갈수록 무의미하게 되는 상황, 이에 따라 문화의 거의 모든 부분이 상업화되면서 심지어는 전통적인 포토저널리즘도 의심의 눈으로 쳐다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진짜” 고통과 스펙터클로서의 고통의 분별은 밀려오는 이미지의 홍수와 원자화된 현대인의 일상 속에 묻히게 되는 것이다.
카터의 사진에 관한 논쟁은 바로 이런 ‘문화의 상업화’라는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그의 사진에 대한 비판과 옹호는 포토저널리즘이 현대사회에서 처한 역설적 상황, 즉 ‘진실’을 보도해야 된다는 당위와 이미 ‘상업화된 진실’ 사이의 긴장과 모순을 징후적으로 보여주는 예인 것이다. 이는 카터의 사진과 베트남계 미국인 사진작가 닉 우트(Nick Ut)가 1972년에 찍은 「전쟁의 테러」(the Terror of War)를 비교하면 잘 드러난다. 우선 닉 우트의 사진과 카터의 사진에는 약 20년의 시간차가 존재한다. 닉 우트의 사진이 찍혀진 시기는 베트남전과 세계적인 인권운동의 물결에 힘입어 포토저널리즘과 이를 대변하는 단어였던 “종군기자”의 휴머니즘, 그리고 이들의 사진미학에 대한 의문과 반성이 일반화되지 않은 시기였으며, 카터가 활동한 90년대 초반은 이미 사상적으로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정치경제학 면에서는 신자유주의가, 그리고 문화적으로는 문화의 상업화가 이미 일상의 곳곳에 침투해왔던 시기였다. 또한 유독 카터의 「독수리와 소녀」를 둘러싸고 유독 논쟁이 가열되었던 이유는 바로 사진작가의 위치가 너무 ‘안전하다’는 그간의 인식이 이 사진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진 프레임의 미학에서 볼 때, 「전쟁의 테러」에서 작가의 위치는 사진 속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반면, 「독수리와 소녀」에서 사진작가의 위치는 전혀 위험에 노출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닉 우트의 사진에서 사진작가의 위치가 어디이건 간에 작가에게 느껴질 위협과 공포를 독자는 공유하는 반면에, 「독수리와 소녀」에 드러나는 프레임의 논리에 따르면 사체(死體)를 먹이로 삼는 독수리 앞의 소녀는 배고픔 뿐 아니라 잡아먹힐 수밖에 없는 절대적 공포를 경험하고 있지만 사진작가(그리고 독자)는 이 소녀의 물리적, 정신적 상황을 공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카터의 사진을 둘러싼 논쟁은 소위 포토저널리즘이라는 하나의 사진 장르가 오늘날의 문화적 상황에서 겪게 되는 교착상태를 예증하고 있다고 하겠다.
두 번째 사진: 세바스치앙 살가두의 「눈 먼 여인」
사실 카터의 사진에서 드러나는 ‘안전한 거리’는 상업화된 포토저널리즘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대중들이 직면한 문화적 현실이기도 하다. 아서 클라인만과 조안 클라인만(Arthur Kleinman and Joan Kleinman)은 소비사회에서 해결될 수 없는 수 없이 많은 문제들, 특히 고통 이미지의 남용과 세계화(globalization)가 도덕적 피로(moral fatigue), 공감의 고갈, 정치적 무력감 등을 증대시켜 결국 대중을 무감각화(desenitize)한다고 설명하면서, 이런 상태가 대중들의 삶에서 고통의 스펙터클에 대한 ‘안전한 거리’라는 구체적 형태로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대중들은 머나먼 곳의 고통을 ‘남의 일’로 느끼게 되며 동시에 이 고통의 세계화, 재난의 스펙터클화에 둘러싸이면서 고통과 재난에서 비켜선 자신의 일상을 ‘안전’이라는 감성적 거리로 자연스레 치환한다는 것이다.
이런 안전함은 사진 미학에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과거 포토저널리즘의 사진 미학을 단순화시켜서 말하자면, 그것은 소위 고급예술의 미학과는 차별화된 다큐멘터리적 미학, 즉 고통의 현장을 ‘가감없이’ 또는 ‘진실되게’ 전달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미학적 가공이나 예술적 구성이 없이 거친 삶의 현장성이 생생하게 전달될 수 있는 일종의 아마추어리즘(amateurism)을 선호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 “아마추어리즘”이라고 표현된 용어가 실제로 아마추어, 즉 취미로 사진을 찍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종군 사진 기자들은 전문적으로 사진을 찍는 프로페셔널들이며 이들이 찍는 사진은 운수 좋게 맞닥뜨린 순간을 포착한 것이라기보다는 오랜 시간을 걸쳐 준비된 장소 선정, 기다림, 예측 등의 전문가적 요소와 명암, 대비, 구도 등의 사진 미학에 대한 훈련이 결합된 결과라고 봐야한다. 즉, 포토저널리즘은 아마추어리즘과 동일시될 수 없으며 오히려 아마추어적 효과를 노리는 특정한 사진 미학이 지배하고 있는 장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고통을 극화하는 사진들이 독자의 일상과의 (안전한) 거리를 강조하게 되면서 한편으로는 문화산업의 자극적 상업화 경향에 일조하게 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현장감이 강조되기 보다는 오히려 천편일률적이며 식상한 미학적 효과로 귀결될 위험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브라질의 사진작가 살가두((Sebastiao Salgado)의 「눈 먼 여인」(Blind Woman)은 바로 종래의 고전적 포토저널리즘에 대한 반발을 징후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우아하기까지 한 흑백의 이미지는 빛과 어둠의 절절한 대비, 철저하게 계산된 미학적 구도, 의도적인 과장과 디테일의 과감한 생략을 통해 소위 고급예술, 특히 회화에서 발전된 미학적 원리들을 수용한다. 그의 사진은 마치 화가가 그린 그림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프레임 내부의 모든 요소가 통제된 느낌을 준다.
그의 사진에 대해 쏟아진 온갖 비난들은 바로 그가 보여주는 기존의 포토저널리즘에 대한 미학적 배신 혹은 저항에 기인한다. 예컨대 잉그리드 시시(Ingrid Sischy)는 “좋은 의도”(Good Intentions)라는 [뉴욕 타임스 매거진]의 글에서 “인간 비극을 미화한 그의 사진이 결국 그 사진이 폭로한 경험에 대한 우리의 수동성을 강화하는 것으로 귀결된다”로 말하며 그의 “좋은 의도”와 결과가 불일치하다고 주장한다. 물론 살가도 자신은 “사진의 아름다움은 그 사진 속의 사람들에게 존엄(dignity)을 부여한다”며 반박하지만 시시 이외에도 많은 이들은 살가두의 미학적 형식주의를 비판한다. 살가두의 입장에서 이 논쟁을 평가한다면 그것은 바로 아름다움/숭고함과 추함/비참함의 일상적 대립을 극단적으로 무너뜨림으로서 흔히 비참함으로 인식되는 이들에게서 숭고함을 본다는 것이며, 이 때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가진 냉소주의 때문에 고통 받는 자에게 있는 존엄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살가두의 주장처럼 고통 받는 자에게 존엄을 찾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비록 기존의 포토저널리즘 미학에 뚜렷한 한계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의 미학적 방법론에도 문제가 없지는 않다. 그의 미학주의는 남루한 자에게도 존엄이 있다는 선언으로 정치적인 가치는 있지만, 이미 사진 미학의 역사를 통해서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원칙으로 굳어진 ‘객관적’ 방법론, 특히 고급예술에서 발전된 미학의 원칙들을 매우 피상적으로 수입하고 있다. 다시 말해, 물론 약자를 비롯한 모든 이들에게 존엄이 있다는 그의 말은 옳지만, 실제 고통을 묘사하는 모든 포토저널리즘의 사진은 고통 받는 이들도 고통 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인간의 존엄을 이미 그 바탕에 깔고 있으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따라서, 미학형식이이다. 포토저널리즘의 다큐멘터리 방식이 시대의 질곡을 거치며 많은 문제를 드러냈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소위 부르주아 고전 미학에서 발전된 형식을 차용하는 살가두의 사진이 포토저널리즘의 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제1부 흐르는 공동체, 새로운 삶의 모색」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