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참하고 가련한 넋 빠진 민중들이여, 고집스럽게 고통을 받으려 하고 행복에 눈을 감아버린 자들이여! 그대들이 벌어들인 가장 아름답고 가장 찬란한 수입이 눈앞에서 날아가 버리고, 그대들의 논밭이 강탈당하고, 선조들의 오래된 가구들이 들어찬 집들이 약탈당하게 방치하고 말았으니, 더 이상 가진 것이 하나도 없게 될 정도로 그렇게 그대들은 살아가고 있다. 그대들은 재산과 가족 그리고 생명의 반절만을 손에 넣게 되어도 그것을 커다란 행복으로 여기는 것 같다. 그런데 이 모든 손실, 이 불행, 이 탕진은 다수의 원수들에 의해 그대에게 닥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 그것은 분명 바로 한 명의 원수에 기인하는 것이니, 그대들은 그를 지금도 그렇게 위대하게 만들고 있고, 그를 위해 그토록 용감하게 전쟁터로 나가고, 그의 영광을 위해 죽음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 p.30~31
더 이상 복종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라. 그러면 그대들은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를 밀어붙여 일격을 가하라고 하기보다는 더 이상 그를 지지하지 말 것을 나는 그대들에게 요구한다. 그러면 밑동이 뽑혀 제 무게에 짓눌려 무너지고야 마는 거대한 동상과도 같은 그를 그대들은 보게 될 것이다.
--- p.33
폭군들은 민중을 사랑하면서도 의심하고, 민중은 자기를 속이자는 자에 대해서는 순진하다. 입 앞을 스쳐가는 별거 아닌 달콤함에 이끌려 복종에 즉각적으로 자신을 내맡기는 민중보다도 한 마리 새가 화살에 더 잘 낚이는 법이라고, 벌레를 즐겨 먹는 물고기가 낚시 바늘을 오히려 더 잽싸게 물어댄다고 생각하지는 말자. 조금만 간지럽혀주면 그들이 그렇게 즉각적으로 자신을 내맡기게 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연극, 놀이, 익살극, 공연, 검투경기, 신기한 동물들, 동전들, 그림들 그리고 그러그러한 다른 마약들은 고대의 민중에게는 복종의 미끼였고 빼앗긴 자유의 대가였으며 폭정의 도구였다. 고대의 폭군들은 이것들을 수단으로 삼아서 이용했고 이것들로 유혹하여 백성들에게 굴레를 채워서 잠재워 버렸다. 그리하여 우둔해지고야만 민중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이런 헛된 쾌락을 즐기면서 놀이들이 멋있다고 여겼으며, 번쩍거리는 그림들로 읽기를 배우는 어린애들보다도 더 어리석게, 아니 그들보다도 더 심하게 복종하는 데 익숙해지고야 만다.
--- p.69~70
우정은 성스러운 이름이고 신성한 것이며, 그것은 고귀한 자들 사이에서만 존재하고, 서로에 대한 존중에서 태어난다. 그것은 호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직함으로 지탱된다. 다른 이를 믿을 만한 친구로 만드는 것은 다른 이의 전부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친구는 자신의 착한 본성, 충실성, 한결같음을 우정의 담보로 삼는다. 잔혹함, 배신, 부정이 있는 곳에 우정이 있을 수는 없다. 사악한 자들이 서로 한 곳에 모이게 되면 그것은 음모이지 벗들의 공동체가 아니다. 그들은 서로를 좋아하지 않으며 오히려 서로를 두려워한다. 그들은 친구가 아니라 공모자들이다.
--- p.97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은 젊은 인문주의자의 매우 짧은 글에 대해 긴 해제를 덧붙인 것에 대해서 독자에게 양해를 구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독자는 작품의 본질을 파악하는 명민한 시선을 갖추고 있으며, 스스로 작품의 가치를 추출해내는 예리함도 갖추고 있다. 그러나 라 보에시의 작품은 오랫동안 그런 독자들을 만나지 못했다. 앞에서 잠깐 언급하였지만 국내에 소개된 이 책의 한국어 번역들은 저자의 생각과 생각을 담아내는 글을 번역에 반영하지 못했다. 곳곳에서 수많은 의역과 오역이 발견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라 보에시가 이 책을 통해 자유를 위한 지식인들의 책임을 문제 삼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지 못한 것은 기존 번역본들의 가장 큰 오류이기도 하다.
민중의 역량을 과소평가하기보다는 오히려 과거의 자유로움을 기억하도록 민중을 이끌 책임이 소수의 배운 자들, 그리고 이미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라 보에시를 그것들은 장막 뒤에 숨겨버렸다. 그래서 우리가 그동안 만났던 라 보에시는 인간의 자유로운 본질에 대한 탐색을 촉구하는 자가 아니라 단지 정치적으로 폭정을 전복하려는 혁명가의 날선 모습만을 지니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자유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정치적 목소리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곳은 바로 인간의 정신일 것이다. 이데올로기에, 권력에, 탐욕에 이미 노예가 되었다는 것을 인간 스스로 자각하지 못한다면, 아니 자각을 위한 어떤 시도도 하지 못할 정도로 복종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면, 자유의 촉구를 위한 우렁찬 소리들은 여전히 메아리를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다. 기존의 한국어 번역본들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다시 번역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라 보에시의 의도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의 목소리의 떨림을 번역어로 옮겨내면서 조금이나마 느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이 번역에 미진한 점이 많을 것이지만, 인문주의자로서의 라 보에시의 얼굴을 소개할 필요가 절실했다.
---「옮긴이 해제」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