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수아의 전진은 차분했고, 가끔 빨랐다. 그러나 지금의 후진은 단 한 번의 쉼 없이 초고속 진행 중이었다. 이 무서운 속도의 후진에 어떻게든 제동을 걸어야 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어떻게 제동을 걸고 핸들을 바꿔서 다시 전진한다는 거지? 수아의 머릿속은 아직 한낮처럼 쨍쨍했다. 정신 차려, 봉수아. 지금은 한밤중이야. 수아는 스스로를 진정시켜야 했다. 그렇게 계속 그늘도 없는 한낮의 쨍쨍함 속에 있다간 타죽어 버릴지도 모르니까. 어쨌거나 지금은 잔뜩 지치고 힘든 날인데도 잠이 오지 않는 밤의 한가운데였다. 이 노트를 덮어버리지 않을 이유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 p. 52
“……내가 사는 세상은 너무 험한가 봐. 늘 예상치 못한 일이 터지고, 사람들에게선 몰랐던 면을 발견하는데, 그 의외성이 전혀 재밌지 않네. 좀 무섭고 많이 서글퍼.” 수아는 다시 앞서 걸었다. 걷지 않으면 주저앉아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마음을 안 건지 수아의 팔에 연주의 팔짱이 척, 자석처럼 끼워졌다. “술 한잔합시다, 선배.” 연주가 수아를 선배라고 불렀다. 실로 오랜만에 듣는 호칭이었다. 갑자기 지금 왜 선배인 거냐고 물어야 했지만,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 연주의 옆모습이 수아 자신보단 훨씬 단단하고 건강해 보여서, 오늘의 남은 시간은 연주가 하잔 대로 하고 싶었다. 이 순간엔 선배가 아니라 후배라도 좋을 것 같았다. --- p. 205
편지를 받아들기 전, 수아는 자신이 환절기를 지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가 있는 곳과 몸이 머무는 곳의 극심한 온도차. 수아는 거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큰 온도차에 지독한 감기가 걸려 끙끙 앓고 난 뒤에야 완연한 봄이 되든, 깊은 가을이 되든 하는 시기, 환절기. 그 길목에서 수아는 할머니의 편지를 받았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 수면제가 되기를 기대하며 읽어 내려간 그 편지는, 수아의 해열제였고, 진통제였다. 그 정성 어린 약 덕분에 수아는 그 길목에서 주저앉지 않고 무사히 지나올 수 있었다. 이제 수아는 완연한 봄이며, 깊은 가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