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모든 여자들의 자궁은 불쌍하고 위험하다. 저들이 무엇을 낳아 키워야 하는지를 정확히 모르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든, 내 뱃속에서 태동하는 생명에 대한, 아주 경건하고 소중한 임무를 성실히 다할 것이다. 나는 엄마니까.
생명을 키우는 따뜻한 엄마여야 하니까. 그런 다짐은 진지하고 성스럽기까지 했다.
어머니의 계략에 말려들 수는 없다. 한때의 춘정을 이기지 못해 아내 아닌 여자와 몸을 섞었다가 불행하게 태어나는 아이들 간의 갈등을 모르지 않았다.
나, 장길주,
내 이름은 장길주다.
너는 길에서 주운 애다. 장 보러 갔다가 오는 길에 길바닥에서 나았어. 도움을 받을 데도 없고 길바닥에서 너를 나았으니, 혼자 탯줄 끊고 치마 벗어 너를 싸가지고 왔다. 그래서 이름을 길주라고 지었다. 길에서 주운 아이. 나는 거기다 더 부친다. 장 보러 갔다가 길에서 주운 아이.
그이기도 하고 그녀이기도 한, 그의 이니셜은 Y다. 내가 찾아낸 최고의 자궁이며 모성이며 생의 원천이기도 하다. 존재하고 있는 것이 모두 그러하듯이, 어머니의 자궁을 빌려 이 세상에 나오는 순간, 그 곁에는 Y가 존재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나는 상처받고 슬퍼하며, 가끔은 맑은 하늘도 보면서 허망한 존재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
-21그램은 진짜 영혼의 무게일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영혼이 가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뇌 속에 있다는 말에도 나는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팔딱거리는 가슴 한 언저리, 거기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내 생각은 고집이었다. 그 고집이 Y를 보게 했다.
-너만 그러고 싶냐? 나도 그러고 싶다.
길주는 아무도 없는 방에서 소리를 질렀다. 속이 좀 후련해지는 듯싶었지만 울컥한 마음에 눈물이 비질거리고 흘렀다.
-너만 그러고 싶냐고?!
금주도 말이 없었다. 길주가 팔려가던 날 집에서 나올 때 아랫목에서 자고 있던 오라비였다. 몰랐다고는 못 할 것이다. 혹, 그때는 몰랐다 하더라도 찾으려면 그 세월이 얼만데 이제야 나타나 오라비라는 걸 밝히는가.
징그럽다. 살아온 세월이 징글징글하다. 여필종부, 여자는 세 남자를 따라야 한다든가. 아버지, 남편, 아들. 그게 법도라, 길이라, 입 다물고 살아온 세월이다. 죽은 듯 살아온 세월이다. 아니 죽지 않으려고, 살아남으려고, 이를 악물고 살아온 세월이다.
한을 풀지 못하고 가슴에 쌓이면 독이 된다. 그 독은 사람의 영혼을 병들게 해.
사랑하는 딸, 너를 위해 살아라, 후회 없이! 그 방법이 어떤 것일지라도 너 자신을 위해! 회전목마는 아름답고 평화롭지만, 너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바라볼 풍경은 아닌 것이다.
가끔 어머니의 편지 구절이 생각났다. [우리가 별처럼 멀어져 있을 때]라는 문장. 그 뒤를 잇는 문장은 각자 생각 나름이다. [우리의 관계는 아름다울 것이다]라든가, [서로가 그리울 것이다]라거나.
-세상은 변하는 거야.
그가 확인하듯 큰소리로 말했다.
-세상은 유사 이래로 언제나 변했지.
구남도 암호 같은 그의 말에 대꾸했다.
-우리의 양심도 변해야 해. 제사 못 지낸다고 상심할 것도 없어. 조상 영혼은 제사 안 지내준다고 우리를 해코지하지 않을 거니까.
-그래도 아들이 있으면 든든하긴 하지?
구남이 건조하게 물었다.
여자들은 어쩌면 전사일지 모른다. 이미 오래전 옛날에 있었던 모계사회에서 익혀온 전투적 본성이, 나이 들면서, 세상이 바뀌면서, 드러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하고 싶던 일을 열심히 하면서 자신만의 생을 즐기려는 전사들. 그렇게 따지면 상철은 그녀에게 버리고 싶은 짐이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도 어머니의 목소리를 잊지 못한단다. 얼마나 한스러웠으면 그 말을 하고 또 하고 했을까. 그 말을 할 때의 할머니를 유심히 본 적이 있니? 그건 제도에 대한 반항이었어. 반항할 수 없는 여자의 반항. 여자가 견디어내야 하는 것들은 덕목이라는 말로 포장되었지. 여자여서 참아내야 하는 불합리한 것들에 대한 반역은 할 수 없도록 제도가 꽁꽁 묶어두었지.
할머니는 오히려 새로운 세상을 사시고 싶은 게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너무도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여자의 도리를 벗어낼 자신이 없었던 거지. 그래서 아들을 찾는 거야. 당신의 한을 풀어줄 대상은 아들뿐이니까.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