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삶을 소망하는 분들에게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일인가?’
어느 누구도 이런 질문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런데 이런 질문이 젊은 날에만 떠오르다가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갈수록 점점 더 자주 떠오른다. 그래서 인간은 그냥 밥만으로 빵만으로 살 수 없는 존재인가 보다. 내가 고전 읽기를 시작하게 된 것은 이같은 질문에 대한 갈증 때문이다. 이 책을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내적으로 많은 성장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계속될 작업들은 얼마나 많은 기회들을 줄 수 있을까? 생각만 해도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다. 이런 기쁨과 배움 그리고 성장의 기회에 여러분도 동행하길 소망한다.
질주하는 세상 속에서 흔들리고 넘어질 때 더욱더 중요해지는 것,
삶의 본질을 꿰뚫는 생각과 기백을 갖는 일이다!
“나는 그보다는 지혜롭다고. 왜냐하면 그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스스로는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알지도 못하고 또 안다고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강독이 진행될수록 나는 인간의 삶과 세상살이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일침이 2,500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오늘날에도 너무나 잘 들어맞는 것에 절묘한 감동을 느끼기도 하고, 사색에 빠지기도 했다. 자신의 삶을 반석 위에 세우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올바른 정신, 기백을 갖추는 데 있어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들은 귀담아 들어볼 만하다. 참으로 고지식했던 사람, 끝내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던 철학자. 그렇기에 위대함이라는 이름으로 후세에 자신의 족적을 영원히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점심을 할 수 있다면 애플이 가지고 있는 모든 기술을 그것과 바꾸겠다”라고 한 스티브 잡스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기술의 최첨단에 서 있던 천재마저 감복시킬 만큼 위대한 철학자를 당대에는 인정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묘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과연 지식인이란 자신의 시대와 늘 불화하는 것인가. 또 수많은 기술 문명의 발전 속에서도 인간 삶에 대한 고민과 해답은 불변하는 것일까.
“금전을 아무리 쌓아도 거기서 뛰어난 정신은 생기지 않으나, 금전이나 그 밖의 것이 인간을 위해서 좋은 것이 되기 위해서는 공사를 막론하고 모두 정신이 뛰어나야만 생기는 것이다.” 내가 어릴 적만 해도 대학에 가서 소위 철학을 공부한다고 하면 주변 어른들이 ‘밥 굶기 십상’이라고 걱정하셨던 게 눈에 선하다. 나처럼 시골에서 나고 자란 대다수의 사람들은 일단 좋은 학교에 가고, 좋은 회사에 취직하고, 반듯한 가정을 이루는 게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걸 위해 앞만 보고 달려가다 보니 정신이나 영혼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사치였다. 하지만 반생이라 할 나이를 지나고 난 지금, 나는 기꺼이 이 말을 할 수가 있다.
‘철학은 밥을 먹여준다.’
물론 어느 시대나 보통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당장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 급급하게 마련이다. 지나치게 물질적인 것, 외형적인 것을 추구하는 현대 사회는 심지어 젊은이들에게도 한시라도 빨리 그것을 갖춰놓으라고 강요하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재판에 회부되던 당시 아테네 역시 오늘날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시민들 가운데 다수는 자기 자신의 이익, 특히 물질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 본성을 거부할 수 없었다.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이 돈과 명성에 집착하는 것을 경계하면서, 그들이 지혜와 진리를 추구하고 정신을 향상시키는 일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신의 명령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니 내게 이런 운명이 닥쳤다고 해서 내가 이전에 말한 원칙들을 지금 내던져버릴 수는 없네. 그것들은 내게 이전과 거의 같아 보이며, 나는 바로 그 동일한 원칙들을 이전처럼 우선시하고 존중하네.”
소크라테스 하면 가장 많이 떠오르는 것이 ‘너 자신을 알라’ ‘악법도 법이다’와 같은 구절이다. 근데 이 ‘악법도 법이다’는 사실 지금까지 소크라테스가 한 말인지 아닌지에 대한 진위 문제가 있는데, 여기서 고집스러울 만큼 이 법을 따르겠다고 얘기를 하는 것을 보면 그가 직접적으로 그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감옥을 탈출하는 일이 정의의 다섯 가지 원칙 가운데 두 가지를 침해한다고 말한다. 그 하나는 보복에 대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흔히 ‘이에는 이 귀에는 귀’라는 보복에 대해서 무심코 정당성을 부여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이에 분명히 반대 의견을 표한다. 상대방이 자신에게 해를 입히더라도 이를 되갚기 위해서 악을 악으로 갚는 일은 올바른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조국이 자신에게 부당한 사형선고를 내렸다고 해서 그가 조국에 대해 폭력을 행사하는 일, 즉 조국의 명령므 어기고 탈옥을 감행하는 일은 정의로운 일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또한 다른 한 가지 원칙은 소크라테스를 포함한 아테네 시민들과 국가의 관계로 설명된다. 시민들은 국법을 준수하고, 국가는 시민들의 안위를 위해 여러 가지 혜택을 제공하는 묵시적 계약 관계에 있다. 여기서 묵시적 계약 관계는 국가와 시민 사이에 합의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다.
“우리가 인식하고 있지 않은 것들을 발견할 수도 없고 탐구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할 때보다도 알지 못하는 것을 탐구해야만 한다고 우리가 생각할 때 우리는 더 나아지고 덜 게을러질 거라는 사실, 바로 이것을 위해 난 기필코, 내가 할 수 있다면, 말뿐 아니라 행동으로도 싸우려는 것이네.” 소크라테스가 상기론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우리 모두 태어날 때부터 영혼에 ‘길게 늘어선 서가’들을 갖고 태어난다는 점이다. 배움은 바로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서가에서 책을 한 권 한 권 빼서 읽어나가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훌륭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전자는 계속해서 배움을 행하는 자이고 후자는 배움을 중단해 버리는 자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거대한 서가를 갖고 태어나지만, 그 많은 책들을 그냥 보기만 할 뿐 스스로 선택해 읽어나가지 않으면 배움을 진행할 수 없다.
「3장 탁월함에 대한 고찰『메논』: 탐구와 배움은 아는 것을 회복하는 것이다」 중
“오히려 나는 다시 살아나는 일이 정말로 있고, 살아 있는 것은 죽은 것으로부터 생기고, 죽은 자의 영혼은 불멸하며, 착한 영혼은 악한 영혼보다 더 좋은 운명을 맞이한다는 것을 확신하네.”
소크라테스는 무엇보다 죽음을 살아 있는 상태에서 죽어 있는 상태로 영혼이 옮겨가는 과정으로 이해했다. 그 과정에서 영혼은 계속 살아남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탄생은 죽어 있는 상
태로부터 살아 있는 상태로 영혼이 옮겨오는 과정으로 보며, 이 과정에서도 영혼은 살아남는다.
이 같은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영혼 불멸을 뒷받침하는 그의 주장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차
지한다. 따라서 조금 더 상세히 그의 주장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만물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며, 서로 반대되는 것들은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부터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작은 것은 큰 것에서, 약한 것은 강한 것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삶과 죽음도 마찬가지다. 삶은 죽음으로부터 나오고, 죽음 역시 삶으로부터 나온다. 영혼이 영원히 산다면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죽음 잇후에 육신을 붙들고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라고 권한다.
“어머니의 본성을 갖고 있어서 늘 결핍과 함께 삽니다. 그런가 하면 또 아버지를 닮아서 아름다운 것들과 좋은 것들을 얻을 계책을 꾸밉니다. 용감하고 담차고 맹렬하며 늘 뭔가 수를 짜내는 능란한 사냥꾼이지요.”
에로스의 아버지는 방책의 신이고 어머니는 궁핍의 신이라니, 어떻게 2,500년 전에, 그것도 나이 지긋한 사람이 사랑을 이렇게 절묘하게 묘사할 수 있었을까? 에로스의 특성을 하나하나 짚어가는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들을 읽으며 한참을 혼자 웃었는데, 그가 에로스에 내린 정의에 백 퍼센트 동의가 되었다. 얼마나 재미있는가. 한쪽은 소유하고 싶은 생각이 가득 차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것을 채우기 위해 교묘하게 머리를 굴린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에로스의 본질에 이어 소크라테스가 전하는 에로스의 특성은 아름다움의 신 아프로디테, 방책과 방도의 신 포로스(그의 어머니 메티스 역시 계책과 꾀의 신), 그리고 궁핍의 신 페니아의 특성이 조합된 것으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마치 사다리를 이용하는 사람처럼 그는 하나에서부터 둘로, 둘에서부터 모든 아름다운 몸으로, 그리고 아름다운 몸들에서부터 아름다운 행실들로, 그리고 행실들에서부터 아름다운 배움들로, 그리고 그 배움들에서부터 마침내 저 배움으로, 즉 다름 아닌 저 아름다운 것 자체에 대한 배움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누군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지를 보게 되면 그 사람의 삶의 지향성을 어렴풋이나마 깨달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남녀의 사랑에 치중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자기만의 정신세계를 사랑할 수 있고, 어떤 이는 도와 같은 진리의 세계에 대한 사랑을 자신의 중심에 놓기도 한다. 물론 그 바탕에는 무언가를 갈구하는 사랑이란 것이 놓여 있는데, 이처럼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르게 사는 것인가라는 질문과 맥이 닿는다. 드디어 사랑에 대한 디오티마의 이야기는 종착역에 다가서게 된다. 여기서 그 유명한 ‘사랑(에로스)의 사다리’ 이야기가 나온다. 이는 사랑 또한 일정한 단계를 거치며 발전해 간다는 ‘사랑의 발전 단계론’이다.
“속 편한 알키비아데스, 부디 나의 말과 델피에 있는 글귀를 받아들여 자네 자신을 알도록 하게. 적수는 이들이지 자네가 생각하는 자(아테네 정치가)들이 아니니 말일세.”
?원전 433년의 어느 날, 스무 살이 채 되지 못한 나이에 정치에 뛰어들고 싶어 안달하는
청년 알키비아데스와 소크라테스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공직을 맡기 전에 우
선 자신을 알고 돌보는 일을 먼저 행하라고 권한다. 정치 입문에 필수적인 조건은 정치가 자신이 정치에 입문하기 전에 명확한 철학적 자기인식을 갖추는 일이다. 이를 ‘먼저 배우고 자신을 돌봐 단련하고서, 왕과 맞붙으러 가야 한다’는 비유를 사용한다. 위에 등장하는 인용문 ‘너 자신을 알라’는 델포이(델피) 신전에 새겨져 있는 말로서 소크라테스가 한 말로도 알려져 있다. 소크라테스에 의해 이 말이 처음 등장하는 대목이 바로 『알키비아데스 I』이다. 정치란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돕는다는 의미가 훨씬 크다. 그러므로 그릇이 되어 있지 않은 자가 정치를 하면 그 반대의 현상이 일어난다. 이 책의 주인공인 알키비아데스 역시 그랬다. 그러므로 자신을 알고 자신을 먼저 닦으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정치에서도 진리이다. 먼저 인간이 되라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