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의 집은 글과 같다. 둘 다 물질적이면서 비물질적이다. 지폐라는 물건과도 비슷하다. 그 자체로 물건인 동시에 다른 어떤 것을 나타내는 물건인 것이다. 우리는 글쓰기가 만들어낸 간극을 메우기 위해 작가의 집에 가서 다시 한 번 작가와 글을 결합시키려는 시도의 불가능성과 마주한다. 우리가 얻는 것은 글이 자신과 동시에 다른 어떤 것을 보여주는 마법 같은 재주의 향연이다.--- p. 37 「Chapter2 ‘나를 다시 보고 싶거든 당신의 장화 밑창을 들어 보라: 『풀잎』의 시인 월트 휘트먼’」
최고의 리얼리즘은 자신의 속임수를 의식한다. 스스로를 인식하고 허구로서의 지위를 인정한다. 그래서 내가 애로헤드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매사추세츠 주 레녹스 소재, 이디스 워튼의 집을 그렇게 좋아하는 것이다. 2002년 이디스 워튼의 집, 마운트 저택 100주년을 기념해서 비영리단체인 이디스 워튼 복원 사업회의 대표는 유명 실내장식가들에게 의뢰해 “워튼 가 사람들이 오늘날을 살고 있는 것처럼” 방들을 재창조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실내장식가들은 검은 노트북 컴퓨터를 놓고, 계단은 표범 무늬 깔개를 깔고, 식당에는 추상표현주의 그림을 걸고 거실 탁자에는 스타 잡지와 하버드 동창회보를 놓았다.--- p. 55 「Chapter3 ‘톰 소여와 허클베리 핀이 살아 있다고?: 마크 트웨인의 착한 시골 마을’」
작가의 집이 허구를 현실화하는 쪽으로 아예 전향을 하면, 어차피 허구의 인물들이 어땠는지 알 길이 없는데도, 지나치게 진지해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트웨인은 절대 그런 작가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트웨인이 천재적인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이 허구의 창조자라는 점을 잊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엄정하고 충직한 재창조보다는 더욱 현실처럼 실재의 세계를 증강시켜 주는 상상력의 활약을 마음껏 즐겼다. 거기에, 가끔 은근슬쩍 흐려지는 진실과 거짓의, 진심과 가장의 경계를 탐험하는 데도 큰 기쁨을 느꼈다.--- p. 57 「Chapter3 ‘톰 소여와 허클베리 핀이 살아 있다고?: 마크 트웨인의 착한 시골 마을’ 중」
너무 쉽게, 사람들은 독서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내야만 한다는 강박을 가진다. 독서를 거래로, 독자에게만 이득이 되는 교역으로 생각한다. 나에게 독서는 주는 행위, 나 자신을 내려놓는 행위이며 나는 늘 독서를 할 때마다 그렇게 하려고 열심히 노력한다. 독서가 자아 발견의 수단이라고 주장하는, 자신의 이미지 속으로 문학 작품을 삼켜 버리려 하는 우리 시대의 편견이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는 차라리 책의 문턱에 자신을 내려놓고, 작품이 나를 지배하도록, 자신을 제공하겠다. 내가 독서를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은 자신을 버릴 수 있도록 해주는 능력 때문이다. 에머슨이 썼듯이 “만족을 모르는 욕망을 생각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 자신을 잊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놀라움을 경험하고, 영구적 기억을 내려놓고, 왜 혹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무언가를 하는, 즉 새로운 원을 그리는 것이다.”--- p.89 「Chapter4 ‘이상을 꿈꾸던 작가들의 공동체: 『월든』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
헤밍웨이는 무엇을 원했을까? 집을 짓밟고 돌아다니며 소지품을 기웃거리는 우리를 작가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헤밍웨이는 너무 젊어서 너무 유명해졌고, 수십 년을 유명인 작가이자 미국 문화의 상징적 인물로 살아왔다. 자신의 사후 모습에 대해서도 짐작하고 있었다. 이런 관심을 욕망하기도 했고 동시에 바로 그런 가능성에 대해 극렬히 방어적으로 굴기도 했다. 게다가 자살로 인해 문제는 더 복잡해졌다. 자신의 마지막을 스스로 정했기 때문이다. 작가가 자신의 문학적, 지적 자산이나 개인 소유물을 어떻게 처분하라는 말을 남겼는가? 만일 그랬다면, 우리에겐 그 말을 따라야 하는 의무가 있는가?--- p.136 「Chapter5 ‘관광지 협잡과 역사 보존의 딜레마: 나쁜 남자 어니스트 헤밍웨이’」
포의 집은 현대 미국 동부 연안 도시 지역의 빈곤 지형도를 보여준다. 원래는 부서졌을 포와 관계된 집들이 보존되어 관광객에게 공개되고 있다. 셋 모두 지자체에 의해 운영되며 늘 예산이 부족하다. 포는 늘 빈털터리였으며 집을 산 적이 없고 어느 한 셋집에 오래 산 적도 없었다. 이런 집들은 미국 작가로서 포가 성공했음을 보여주는 걸까,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걸까? 그리고 이런 박물관들은 1849년 포의 사망 이후 미국의 경제 성장과 확장을 보여주는 지표인가, 아니면 이 모든 궁핍한 사람들에게 보다 나은 조건을 마련해 주지 못하는 실패의 증거인가.--- p.208 「Chapter9 ‘부서지지 않을 정도까지만: 추리소설의 효시 에드거 앨런 포’」
나는 ‘집 아닌 집’을 열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실제 존재하는 집들에서 발견한 것이 열망이니까. 부재가 이런 장소들을 실감나게 만들며, 현존은 때로 방해만 된다. 나는 빌린 책상 위 가짜 원고 같은 것보다 불에 탄 석재 유적이나 ‘부식의 억제’ 원칙이 마음에 든다. 헤밍웨이가 자살한 좀 끔찍한 거실에 들어가 볼 수 있어서 감사했지만, 그 집이 박물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며, 어쩔 수 없이 케첨의 욕심 많은 네 번째 집 소유 부자들(사생활 보호 때문에 박물관화를 반대한 헤밍웨이 이웃의 부자들)과 같은 편이 된다. 책이 인쇄되는 한, 혹은 전자책이나 인터넷으로 볼 수 있는 한 저자는 누구에게나 접근 가능한 존재다.
우리가 뭔가를 더 하고 싶다면, 작가의 이름으로 수여되는 장학금이나 지원금, 혹은 창작 공간 지원이 필요한, 자격 충분한 학생들과 작가들이 아주 많이 있다. 글쓰기는 돈이 너무 안 되며 일반에 공개된 집들을 유지하는 데는 돈이 너무 많이 든다. 왜 문학의 과거 거주지를 지원하는 데 더 많은 돈을 써야 하는가?--- p.218 「Chapter10 우리 동네 작가의 집을 찾아서: 찰스 체스넛, 랭스턴 휴스」
작가의 집 박물관은 허구이며 우리 관람객은 그 독자다. 우리가 그 집에서 의미를 끌어낸다. 결국 바르트가 옳았던 것 같다. 책과 마찬가지로 집도 우리 상상력 안에서 재창조되며, 일단 안으로 들어가면 우리 마음대로 그들을 체험할 수 있다. 비난할 수도, 존경할 수도, 시대착오적이 되거나, 경험적 진실을 고집하거나, 그들의 존재를 매도할 수도 있다. 우리와 저자의, 그 장소의, 우리 자신의 관계에 의거해서 말이다.--- p.226 「Chapter10 우리 동네 작가의 집을 찾아서: 찰스 체스넛, 랭스턴 휴스」
독자를 위한 팁을 하나 드리자면, 이 책은 뒤로 갈수록 흥미진진해진다. ‘저자의 의도’를 따라가기 위해선 처음부터 읽는 것이 좋겠지만 독서의 재미를 위해서는 뒤부터 읽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여러 곳에서 저자가 인정하고 있듯이, 이 책은 그런 내키는 대로의 독서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아야 하는 책이다.
--- p.237 「옮긴이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