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누구나 컴퓨터, 휴대전화 등을 통해 정보를 얻음은 물론, 나아가 그것들을 이용해 언어, 사진, 그림, 소리 등으로 의미를 생성하고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다중매체 시대다. 이 디지털 세상에서 폭발적으로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것 즉 콘텐츠는, 담화의 ‘지배적’인 양식이 이야기인 만큼 그에 속하는 것이 많다. 특히 문화산업의 엔터테인먼트 분야 생산물은 대부분이 이야기 양식을 취하고 있다. 오늘날 매체를 가리지 않고 ‘이야기 콘텐츠’의 창작 곧 스토리텔링이 교육은 물론 산업 면에서도 큰 의미를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오늘날 이야기는 담화 양식 개념으로 넓게 잡을 필요가 있다. 청소년 교육 분야가 특히 그러한데, 기본적 의사소통 능력과 사고력을 기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 p.33
전자매체 혁명은 종이와 펜을 밀어냈지만, 반어적이게도 문자판(키보드)을 비롯한 각종 도구를 사용하여 전보다 훨씬 ‘담화 행위’를 하게 만들었다. 각종 사이트와 플랫폼, 사회연결망서비스를 통해 사람들은 끊임없이 무엇을 쓰거나 촬영해 올리는데, 그것은 결과적으로 수필의 영역을 넓히고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늘렸다. 디지털 혁명은 좁은 의미의 문학에는 위기처럼 여겨질 면이 있지만, 수필에는 도리어 드넓은 가능성의 대지를 열어준 것이다. 이는 이미 무수한 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브런치, 유튜브 등을 채우고 있는 각종 형태의 담화들에서 확인되고 있다. 누구든지 거리낌 없이 글은 물론 소리(음성), 그림(영상, 사진) 등을 함께 사용하여 무언가를 기록?표현?전달하고 있는데, 이는 다중매체 시대의 수필로서 ‘영상 수필’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 p.66
‘이야기’나 ‘서사’라고 하면 대개 언어로 하는 허구적 이야기 곧 ‘서사문학’을 떠올리고, 그중에서도 설화나 소설 갈래 위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는 문학 중심의 개념이다. 다중매체 시대의 스토리텔링 논의에서, ‘이야기’는 인간이 의사소통에 두루 사용하는 담화의 한 양식이라는 개념으로 쓰는 게 적절하다. 그것은 넓은 의미의 이야기, 역사적으로 존재했거나 하고 있는 갈래는 물론 매체, 허구성 여부 따위를 초월한 이론적 갈래 혹은 양식 개념이다. 다중매체 시대에 만약 언어만 매체로 삼는 문학적 이야기 중심으로 스토리텔링에 접근한다면 연극, 영화, 뮤지컬 같은 종합 이야기 예술을 비롯해, 다큐멘터리 창작, 이야기 게임의 기획, 스토리 있는 뮤직비디오나 광고물의 제작, 이야기를 활용한 공간 설계 등 문화 활동 전반에 ‘확장된 스토리텔링’을 아울러 다루기 어려울 것이다. 스토리라는 것이 궁극적으로 언어로 표현되지만, 문학처럼 언어만을 매체로 형상화되지는 않는다. 어떤 스토리를 매체와 형식이 다른 이야기 텍스트로 재창작하는 ‘전용’이 일반화되는 현상만 봐도, 이야기의 범주를 넓게 잡아야 두루 살피기에 좋다.
--- pp.74~75
스토리는 스토리텔링의 재료처럼 보이기 쉽다. 그런데 원론적으로 말하면, 실제 스토리텔링을 할 때 스토리가 먼저 정해진 후 그것을 가지고 서술이 이루어진다고 하기 어렵다. 뒤에 다시 살피겠지만, 대체로 스토리는 창작 전에 이미 마련되어 있는 것이라기보다, 물론 대강의 윤곽을 미리 그려놓기도 하나, 스토리텔링 과정에서 작자가 여러 요소를 결합하여 점차 그려내어 ‘형성’해가는 것이다. 이야기 능력은 그렇게 “서사적 문제의식을 통해 경험(삶)을 줄거리로 구성해내는 능력”이다. 따라서 스토리텔리은 경험과 정보를 사건의 인과적 연쇄에 통합하여 인식하고 표현하는 활동 즉 스토리 형성 활동이요, 스토리는 그 결과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
--- p.79
여기서 설정하는 ‘역사문화 이야기’란 역사, 문화 자연 등을 자료로 창작하여 그 의미와 진실을 드러내고 체험시키는 정보적(실용적) 이야기다. 이는 앞서 언급한 ‘역사문화 콘텐츠’ 개념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그 교육과 연구의 바탕을 마련하기 위해 설정하는 하나의 갈래다. 〔……〕
그것은 첫째, 정보적 이야기가 보다 객관적?공공적인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 작자는 상대적으로 더 객관적인 자료에 대해, 외적 이야기 상황의 맥락에서 공적 태도를 지닌다. 따라서 창작 과정에서 표현적이고 허구적인 이야기에 비해 객관적 사실이나 현실의 구속을 더 받으므로 합리적 사고력과 상상력을 기르기에 더 적합하다. 둘째, 각 교과가 다루는 지식, 현상, 경험 등을 제재 삼아 스토리텔링을 교육 방법으로 응용하기 좋기 때문이다. 표현적이거나 허구적인 이야기는 서술의 형상성을 추구하므로 이른바 ‘문예 창작’으로 기울어서, 각 교과 고유의 지식과 사고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 셋째, 창작 이전에 정보의 수집 및 해석 활동을 요구하므로 문해력, 정보 수집 능력 등을 아울러 기를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 예술성을 추구하는 표현적 이야기의 스토리텔링은 일정한 정신 능력을 갖추고 규범적 형식을 익혀야 하는 데 비해, 정보적 이야기의 스토리텔링은 그럴 필요가 상대적으로 적어 접근하고 활용하기 좋기 때문이다.
--- pp.125~26
경험 이야기 창작은 어떤 가치관이나 사상을 확인하고 주입하기보다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인가에 관한 예민한 의식(가치 의식)과 어떤 것이 보다 보편적으로 옳은가에 관한 의식(윤리 의식), 또 그것들을 판단할 사고력을 기르는 데 초점을 두어야 한다. 기존의 도덕, 규범, 이념 등으로 경험을 재단하기보다, 사건의 양상과 그것을 바라보고 기술하는 학생 자신의 진실되고 주체적인 생각과 느낌 자체가 우선이다. 경험 이야기 창작은 경험―사고와 감정의 합리성을 추구하는―을 쌓기 위한 것이다. 가령 ‘다투었던 일의 옳고 그름에 대하여’라는 윤리적 제재의 이야기를 창작할 경우, 다툰 사건의 전개와 논증적 사색이 잘 결합돼야 하는데, 자기 경험을 ‘남이 보아도 합리성 있게’ 객관화하여 설득하고 감동받게 이야기하는 활동이 바로 반성적 사고의 과정이요 가치와 윤리 의식을 기르는 과정이다.
--- pp.170~71
요컨대 이야기에서 전용은 매우 뿌리 깊고 광범위하게 일어난다. 이야기 행위 즉 스토리텔링의 과정에 초점을 두고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반드시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를 다른 이야기에 활용하는〔하나의 이야기→다른 (하나의) 이야기〕 경우에만 국한하지 말고, 완결된 이야기 형태를 지녔다고 보기 어려운 기존의 모티프, 노래, 담화, 기록 자료 같은 것들을 가져다 이야기 생성에 쓴다든가(비이야기, 준準이야기→이야기), 완성된 이야기(의 일부 요소)를 이야기가 아니라 건축이나 캐릭터 인형 같은 것에 활용하는 경우까지(이야기→비이야기) 두루 전용이라 할 수도 있다. 그렇게 범위를 확대할 경우, 전용은 ‘자료를 이야기 창출에 사용하고 그 결과를 다른 이야기나 사물에 활용하는 이야기 활동 전반’을 두루 가리키는 말이 된다.
--- pp.193~94
오늘날 같은 다중매체 시대에는 담화의 매체를 다양화하고 각 매체의 담화적 특성과 문법에 관해서도 교육해야 한다. 각종 ‘매체의 언어’를 ‘읽고 표현할’ 줄 아는 능력을 길러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문해력 즉 글을 읽고 쓰는 능력에 더해 영상 문해력이 중요해졌으므로, 이른바 영상 언어가 또 하나의 언어가 되어가고 있다. 가령 서구의 영화에서 음식을 먹는 모습은 기독교적 맥락에서 볼 때 탐욕을 환기하여 인물의 부정적 이미지를 강화하는 경우가 많다. 또 그 모습을 카메라가 어떤 각도에서 촬영하느냐에 따라 효과가 달라진다. 교육이 이러한 이미지 혹은 시각 언어의 기호적 특성과 문법 따위를 교육해야 하는 시대, 한마디로 원고지를 버리고 모니터의 가상공간을 소통은 물론 문화 활동 공간으로 만들게끔 이끌어야 하는 시대이다.
--- p.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