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며, 유한한 나 자신이고, 나아가 유한한 구(球)인 지구이며, 유한한 태양계이자, 엄청 크다 하더라도 이 또한 유한한 은하계와 이 은하계에 속한 수백만의 별들입니다. 은하계는 훨씬 더 거대한 성단(星團)에 속해 있으며, 이 성단 또한 초거대 성단에, 이 초거대 성단 역시 우주의 어떤 지역에 속해 있는 등, 점점 더 크기를 키워가며 이 같은 분류는 반복될 것이며, 우리는 어디에서 이것이 끝날지 알지 못합니다. 이 같은 분류가 끝나지 않을 때 바로 그때를 무한이라고 정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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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는 존재는 유한하며, 인간이라는 존재는 분명 무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무한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지금 제가 여러분에게 무한에 관해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우리는 유한하지만, 무한에 대해 완벽하게 모르고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무한에 관해서 말할 수 있고, 그것에 이름을 부여했으며, 무한이 무엇인지, 아니면 우주가 과연 무한한지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비록 유한하다 하더라도, 인간은 무한에 관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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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생각 속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무한에 관한 개념이 존재합니다. 첫 번째 개념은 한계를 만나지 않고 언제나 계속할 수 있는 무엇으로 무한을 이해합니다. 이 무한은 학술적이지만 아주 단순하게 ‘잠재적’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무한입니다. 왜 잠재적일까요? 이 무한 속에서 나는 앞으로 나아가면서 산책할 수 있으나 절대로 무한한 총체를 만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산책의 무한입니다. 한계를 만나지 않은 채 나는 거기서 산책할 수 있으며, 그것은 늘 새롭고, 더 크며, 다른 것입니다만, 항상 끝납니다.
또 다른 무한이 존재하는데, 칸토어가 소개했던 무한, 하지만 이미 신의 무한이거나 우주였던 무한입니다. 이 무한은 모든 무한한 숫자들을 포함하는 진정으로 무한한, ‘현실적’ 무한입니다. 현실적 무한은 잠재적 무한의 한계와도 같습니다. 잠재적 무한 속에서 나는 하나의 숫자에서 이보다 항상 큰 숫자로 이동하며 절대로 끝에 도달하지 못하지만, 현실적 무한 속에서는 일종의 봉투 안에 모든 것을 넣고 끝에 도달합니다. 만약 제가 무한하게 살 수 있는 보행자였더라면, 나는 모든 숫자를 가질 때까지 걸을 수도 있을 것이며, 그렇게 해서 마침내 현실적 무한에 다다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p.20-21
인간 존재가 죽음보다 더 강하다는 것은 생각이라는 일종의 작업에 의한 겁니다. 우리가 죽음보다 더 강해질 수 있는 것은, 삶에서 벌어지는 축제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무한 그 자체를 생각으로 지배하면서입니다.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칸트는 기“과학의 확실한 길이 열리게 됐고 모든 시간대에서 그리고 무한한 거리에서 자취를 남기게 됐다.”라고 말합니다. 기하학을 발명한 사람은 무한한 거리에 있었던 무언가를 열어 보였습니다. 그는 불쌍한 우리 유한한 존재가 무한을 향해 나아가게 해줬습니다.
--- p.24-25
몇몇 철학자는 우리가 무한을 생각하므로 무한과 실질적인 관계가 있고, 또한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 안의 어떤 것이 무한하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데카르트는 유한한 존재인 우리가 내면에 무한에 대한 사유를 품고 있으므로 무한과의 소통이 반드시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신이 우리의 정신에 무한에 대한 생각을 불어넣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신일 수밖에는 없는데, 유한한 존재인 우리가 어떻게 무한에 관한 사유를 품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신과 연결돼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무한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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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완료된 어떤 무한한 시간을 상상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진행되는 무언가가 끝나는 어느 순간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종교는 자주 세계의 종말이 존재한다고 선언하며, 이때 종말은 무언가가 시간 속에서 완료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지금으로서 시간은 잠재적 무한이라는 의미에서 무한하며, 시간은 지속되고 우리도 시간과 더불어 그러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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