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용하는 일상 언어에는 관용표현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Erman & Warren(2001: 29)에서는 일상적 입말과 글말 텍스트의 50% 이상이 넓은 뜻의 관용표현이므로, 이들을 하찮은 현상으로 간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관용표현’은 글자 그대로 한 언어 공동체가 ‘관습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으로서, 사회 문화적인 배경을 기반으로 공동체의 삶과 시간의 자취가 묻어 있다. 특정한 상황에서 적절한 관용표현을 사용하고 이해하는 것은 개념화자가 공동체의 구성원 자격을 갖추는 징표가 된다. 따라서 관용표현은 그 존재론적 위상뿐만 아니라, 효율적인 언어생활을 꾸려나가고 그를 돕는 언어교육의 장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이에 이 글은 관용표현의 기본 개념을 바탕으로 관용표현의 이해에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 준 인지언어학적 관점의 주요 탐구 사항과 앞으로의 과제를 살펴보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관용표현에 대한 언어학적 시각은 1980년대 후반에 출범한 인지언어학을 기점으로 분수령을 이룬다. 이른바 ‘전통적 관점’에 따르면 관용표현은 언어 테두리 속의 문제로서 그 의미와 형식이 고정되고 관습화된 것으로 간주해 왔다. 이것은 관용표현의 형식과 의미가 자의적인 현상임을 뜻하는데, 이로써 이 범주에 대한 탐구의 흥미가 상당 부분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모국어뿐만 아니라 외국어를 학습할 때도 관용표현의 의미와 구성 형식은 관습적이며 자의적이라는 교조적 언명에 따라 그 각각의 용법을 그저 그렇게 수용하고 암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객관주의 언어학의 위세 속에서 긴 침묵과 어둠을 깨고 1980년대에 등장한 인지언어학은 비유의 일환으로서 관용표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져왔다. 우선 인지언어학은 ‘언어’의 탐구를 언어 자체의 자율적인 테두리 안에서 분석ㆍ기술ㆍ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가진 ‘사람’, 그리고 ‘사회 문화적 배경’과의 상관성 속에서 설명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Evans(2009: 50)에서는 인지언어학(Cognitive Linguistics)’을 말, 마음, 사람의 사회 문화적 경험 간의 관계를 탐구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언어적 사고와 관행을 연구하는 현대 학파로서,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의 ‘학제간 기획(언어학ㆍ철학ㆍ심리학ㆍ인류학ㆍ컴퓨터과학ㆍ신경과학)’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며 급속도로 발전하는 학문 분야라고 하였다.
이 연장선상에서 관용표현의 본질을 개념화의 문제로 파악하게 되었다. 이로써 관용표현에 대한 시각이 언어 자체의 문제에서 사회 문화적인 배경을 기반으로 언어를 부려 쓰는 사람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개념화로서 그 지평이 확장되기에 이르렀다.
인지언어학적 관점에서 관용표현에 대한 탐구는 개념적 은유와 환유, 범주화, 다의어, 동기화, 구문 등에 비해 그다지 활성화되지는 못한 영역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범주의 탐구에 대한 공감대가 점차 넓어지고 탐구의 방향과 기제가 비교적 잘 설정되고 개발됨으로써 “옛길에 새 걸음으로 발맞추리라!”의 기치 아래 멀지 않은 장래에 괄목할 만한 성과가 기대된다. 이 바람의 기반 위에서 이 글에서는 다음 세 가지 사항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관용표현의 기본 개념을 기술한다. 둘째, 인지언어학적 관점에 따른 관용표현 탐구의 주요 사항을 기술한다. 셋째, 인지언어학적 관점에 바탕을 둔 관용표현의 탐구 과제를 기술한다.
2. 관용표현의 기본 개념
여기서는 용어와 정의, 그리고 전통주의와 인지주의 관점을 중심으로 관용표현의 기본 개념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2.1. 용어와 정의
먼저, 용어에 대해서이다. ‘관용어’, ‘관용구’, ‘관용어구’, ‘관용성’, ‘관용표현’, ‘성구소’, ‘숙어’, ‘상투어’, ‘익은말’, ‘익힘말’에서 보듯이 이 범주에 대한 용어는 매우 다양하다. 이들 용어 가운데 ‘관용어’ ‘숙어’ ‘상투어’는 ‘어(word)’에, ‘관용구’ ‘관용어구’ ‘성구소’는 ‘구(phrase)’에 초점이 놓이는 반면, ‘관용성’ ‘관용표현’ ‘상투어’는 포괄성을 지닌 것이며, ‘익은말’ ‘익힘말’은 토박이말 용어이다. 이러한 용어의 다양성은 이 범주가 복합적인 성격을 띠면서 ‘단어’에서 ‘구’, 그리고 ‘문장’ 층위에 걸쳐 있으며, ‘속담’과의 경계도 흐릿함을 뜻한다. 예를 들어,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어처구니-없다’를 단어로, ‘개밥에 도토리’를 속담으로 처리해 놓고 있는데, 이들은 ‘구’ 층위의 관용표현이라 하겠다.
여기서는 ‘관용표현(idiomatic expression)’이란 용어를 사용하기로 하는데, 그 원형적인 형식은 ‘구’ 층위의 ‘관용구’라 하겠다.
다음으로, ‘관용표현’의 정의에 대해서이다. 전통적으로 관용표현은 둘 이상의 구성 요소가 결합체를 이루면서 내용적으로 의미가 특수화되어 있고, 형식적으로 구성 방식이 고정되어 있는 결합관계를 일컫는다. ‘미역국을 먹다’라는 관용표현을 통해서 그 의미와 형식적 특성을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의미적인 측면에서 관용표현은 구성 요소의 의미 총합이 아닌 제3의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다. 곧 관용표현의 의미는 합성적인 구와 달리 대체로 비합성적이다. ‘미역국을 먹다’는 ‘미역으로 끓인 국을 먹다’라는 ‘직설적 의미(literal meaning)’와 ‘실패하다’ 또는 ‘낙방하다’라는 ‘관용적 의미(idiomatic meaning)’를 지닌다. ‘미역국을 먹다’가 관용표현인 경우 그 의미는 ‘미역국’이라는 명사와 ‘먹다’라는 동사의 개별적 의미의 합성을 넘어선다.
둘째, 형식적인 측면에서 관용표현의 구성은 대체로 고정된 형식을 지니게 된다. ‘미역국을 먹다’는 직설적 의미인 경우 변형이 자유로우나, 관용표현인 경우 ‘미역국’과 ‘먹다’의 결합관계는 고정되어 통사적 변형이 자유롭지 않다. 곧 성분을 확장하게 되면 (1)과 같이 ‘실패하다?낙방하다’라는 의미가 나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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