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바깥에서는 우키요에가 일본 미술을 대표한다
는 점에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호쿠사이와 히로시게의 판화가 근대 유럽 회화와 공예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우키요에에 관한 연구도 유럽과 미국에서 시작해 일본에 역수입되었다고 할 수 있다.--- p. 3
장르의 다양화 외에도 에도 말기 우키요에 판화의 특색으로서 곧잘 ‘공예적’이라고도 하는 정교함의 추구를 들 수 있다. 목판 기술은 호리, 스리의 양면에서 막부 말기에서 메이지에 걸쳐 최고도의 발달을 보였다. 예를 들어서 게와리(게보리라고도 한다)라 불리는, 인물의 머리카락이 난 언저리를 표현하는 호리는 고작 1밀리미터 폭에 세 가닥의 털을 새겼다. 이 고도의 기법이 일반적인 우키요에에도 당연하게 나타나며, (중략) 판화를 찍는 과정에서도 다채로운 기교를 구사하여 대단히 정교한 표현이 행해지게 된다.
복잡한 줄무늬 등, 당시 유행한 옷감의 무늬를 미인화의 배경에 넣은 우키요에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 또한 우키요에 판화의 묘사력이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p. 41, 45
[남모를 깊은 사랑]의 여성은 살짝 입을 열고 있어서 검은 칠을 한 치아가 보이며 한숨을 쉬는 것 같은 모습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떠올리고, 갑자기 착잡한 마음이 든 걸까. 의미심장한 제목과 맞물려 여러 가지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그림인데, 이 또한 인물의 몸짓이나 미묘한 표정을 포착해내는 우타마로의 뛰어난 솜씨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p. 62
샤라쿠가 두꺼운 화장으로 얼굴을 가리고 무대에 서
는 배우들의 맨 얼굴을 까발렸다면, 도요쿠니는 어디까지나 당시 사람들이 인기 배우들에 관해 떠올렸던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 미화를 빠트리지 않았다. 『우키요에루이코』에서 샤라쿠에 대해 “너무나 닮게 그리려고 해서 오히려 진실이 아닌 모습이 되었다”라는 부분의 ‘진실이 아닌 모습’이란 당시 가부키 팬들이 배우에 대해 지녔던 이미지와 다른 모습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앞서도 말한 것처럼 배우 초상화는 오늘날 인기 배우의 브로마이드와 비슷한 구실을 했으니 샤라쿠와 도요쿠니 중 어느 쪽의 그림을 사람들이 더 좋아했을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p. 77
이러한 우키요에 화조화 판화는 어떤 식으로 소비되었을까? 우타마로가 당시 서점의 모습을 그린 [에도 명물 니시키에고사쿠]에는 표구를 한 단자쿠반(혹은 하시라에반) 크기의 호랑이 그림이 보인다. 이처럼 간편하게 종이로 표구를 해서 실내를 장식했을 거라고 생각되는데, 꽃과 풀을 그린 작은 그림을 병풍에 붙인 모습이 구사조시 등의 삽화에 자주 나오는 걸로 봐서, 우키요에의 화조화 판화도 대다수가 그런 식으로 사용되었으리라고 여겨진다. 오늘날 고미술 시장에서 히로시게의 풍경화는 쉽게 볼 수 있지만, 그가 그린 화조화는 훨씬 적다. 애초에 적게 그렸을 수도 있지만, 이처럼 후세에 남기기 어려운 방식으로 사용되었던 것도 이유가 아닐까 싶다.--- p. 97
이러한 미타테에는 일종의 지적 유희이지만, 우키요에 판화 속에서 필요 때문에 어떤 이미지를 다른 이미지에 빗댄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이는 특정 시대 이후의 주제를 다룬 무샤에나 특정한 정치적 사건 등을 그린 그림의 경우이다. 당시, 도쿠가와 가문이나 덴세이 연간(1573~1592) 이후의 다이묘 가문에 관한 내용을 다루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p. 140
이처럼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나 세태를 암시적으로 풍자한 무샤에는 과거의 사건에서 따온 제목을 달거나 등장인물이 과거의 가문을 달고 나오는 등 어떻게든 조금씩 은폐하긴 했지만, 얼른 보아도 어떤 인물이나 사건을 가리키는지 알 수 있어서 종종 절판 명령을 받았다. 당대의 정치 권력과 관련된 제재였던 터라 당국이나 그 뜻을 받들어 검열하는 자나 예민하게 반응했다.--- p. 152~153
우키요에 판화는 에도를 대표하는 기념품으로서 전국 어디서나 좋아했다. 에도 말기에는 우키요에 판화를 나고야와 교토?오사카 등지에서도 제작했는데, 특히 오늘날 ‘가미카타에’라 불리는 교토?오사카의 판화는 기술적으로도 에도의 판화와 비교해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에도의 우키요에 판화는 축적된 전통을 바탕으로 유명 화가들이 여럿 활동했던 데다 일본 최대의 도시의 풍속과 경관을 시각적으로 전달한다는 이점 때문에 ‘아즈마니시키’라고도 불리며 에도의 특산품으로 여겨졌다.--- p. 193
일본 바깥에서는 우키요에가 일본 미술을 대표한다
는 점에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호쿠사이와 히로시게의 판화가 근대 유럽 회화와 공예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우키요에에 관한 연구도 유럽과 미국에서 시작해 일본에 역수입되었다고 할 수 있다.--- p. 3
장르의 다양화 외에도 에도 말기 우키요에 판화의 특색으로서 곧잘 ‘공예적’이라고도 하는 정교함의 추구를 들 수 있다. 목판 기술은 호리, 스리의 양면에서 막부 말기에서 메이지에 걸쳐 최고도의 발달을 보였다. 예를 들어서 게와리(게보리라고도 한다)라 불리는, 인물의 머리카락이 난 언저리를 표현하는 호리는 고작 1밀리미터 폭에 세 가닥의 털을 새겼다. 이 고도의 기법이 일반적인 우키요에에도 당연하게 나타나며, (중략) 판화를 찍는 과정에서도 다채로운 기교를 구사하여 대단히 정교한 표현이 행해지게 된다.
복잡한 줄무늬 등, 당시 유행한 옷감의 무늬를 미인화의 배경에 넣은 우키요에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 또한 우키요에 판화의 묘사력이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p. 41, 45
[남모를 깊은 사랑]의 여성은 살짝 입을 열고 있어서 검은 칠을 한 치아가 보이며 한숨을 쉬는 것 같은 모습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떠올리고, 갑자기 착잡한 마음이 든 걸까. 의미심장한 제목과 맞물려 여러 가지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그림인데, 이 또한 인물의 몸짓이나 미묘한 표정을 포착해내는 우타마로의 뛰어난 솜씨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p. 62
샤라쿠가 두꺼운 화장으로 얼굴을 가리고 무대에 서
는 배우들의 맨 얼굴을 까발렸다면, 도요쿠니는 어디까지나 당시 사람들이 인기 배우들에 관해 떠올렸던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 미화를 빠트리지 않았다. 『우키요에루이코』에서 샤라쿠에 대해 “너무나 닮게 그리려고 해서 오히려 진실이 아닌 모습이 되었다”라는 부분의 ‘진실이 아닌 모습’이란 당시 가부키 팬들이 배우에 대해 지녔던 이미지와 다른 모습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앞서도 말한 것처럼 배우 초상화는 오늘날 인기 배우의 브로마이드와 비슷한 구실을 했으니 샤라쿠와 도요쿠니 중 어느 쪽의 그림을 사람들이 더 좋아했을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p. 77
이러한 우키요에 화조화 판화는 어떤 식으로 소비되었을까? 우타마로가 당시 서점의 모습을 그린 [에도 명물 니시키에고사쿠]에는 표구를 한 단자쿠반(혹은 하시라에반) 크기의 호랑이 그림이 보인다. 이처럼 간편하게 종이로 표구를 해서 실내를 장식했을 거라고 생각되는데, 꽃과 풀을 그린 작은 그림을 병풍에 붙인 모습이 구사조시 등의 삽화에 자주 나오는 걸로 봐서, 우키요에의 화조화 판화도 대다수가 그런 식으로 사용되었으리라고 여겨진다. 오늘날 고미술 시장에서 히로시게의 풍경화는 쉽게 볼 수 있지만, 그가 그린 화조화는 훨씬 적다. 애초에 적게 그렸을 수도 있지만, 이처럼 후세에 남기기 어려운 방식으로 사용되었던 것도 이유가 아닐까 싶다.--- p. 97
이러한 미타테에는 일종의 지적 유희이지만, 우키요에 판화 속에서 필요 때문에 어떤 이미지를 다른 이미지에 빗댄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이는 특정 시대 이후의 주제를 다룬 무샤에나 특정한 정치적 사건 등을 그린 그림의 경우이다. 당시, 도쿠가와 가문이나 덴세이 연간(1573~1592) 이후의 다이묘 가문에 관한 내용을 다루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p. 140
이처럼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나 세태를 암시적으로 풍자한 무샤에는 과거의 사건에서 따온 제목을 달거나 등장인물이 과거의 가문을 달고 나오는 등 어떻게든 조금씩 은폐하긴 했지만, 얼른 보아도 어떤 인물이나 사건을 가리키는지 알 수 있어서 종종 절판 명령을 받았다. 당대의 정치 권력과 관련된 제재였던 터라 당국이나 그 뜻을 받들어 검열하는 자나 예민하게 반응했다.--- p. 152~153
우키요에 판화는 에도를 대표하는 기념품으로서 전국 어디서나 좋아했다. 에도 말기에는 우키요에 판화를 나고야와 교토?오사카 등지에서도 제작했는데, 특히 오늘날 ‘가미카타에’라 불리는 교토?오사카의 판화는 기술적으로도 에도의 판화와 비교해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에도의 우키요에 판화는 축적된 전통을 바탕으로 유명 화가들이 여럿 활동했던 데다 일본 최대의 도시의 풍속과 경관을 시각적으로 전달한다는 이점 때문에 ‘아즈마니시키’라고도 불리며 에도의 특산품으로 여겨졌다.--- p. 193
야마모토 조켄의 『기비토유키소』와 같은 막부 말기의 여행기에는 에도로 여행 온 사람이 구입한 우키요에 판화 한 장의 가격이 24, 5몬에서 30몬 남짓이라고 나와 있다. 오늘날의 화폐로 환산하면 수백 엔 정도이다. 막부가 제시한 공정가격은 결국 지켜지지 않았고 색 수와 호리의 정교함으로 물가는 움직이고 같은 그림이라도 스리에 공을 들이고 가격을 꽤 높게 한 특별 제품도 만들어져 있다. 또, 인기 작품의 경우는 가격이 더 높았다. 이처럼 우키요에 판화 또한 다른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수요와 공급의 관계로 가격이 결정되었다.--- p. 201~202
우키요에 판화를 화집으로 보거나 미술관의 전시실
에서 유리 너머로 보는 것은, 실물 판화를 뒤집어서 종이에 물감이 깊이 스며든 모습을 직접 보거나 가라즈리를 살짝 (물론 깨끗이 씻은 손으로) 만져보고 그 감촉을 피부로 느끼는 것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우키요에 판화는 전통미술에서 이런 식으로 감상할 수 있는 많지 않은 장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에도의 서민예술이었던 우키요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서민예술로서 지위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p. 236
야마모토 조켄의 『기비토유키소』와 같은 막부 말기의 여행기에는 에도로 여행 온 사람이 구입한 우키요에 판화 한 장의 가격이 24, 5몬에서 30몬 남짓이라고 나와 있다. 오늘날의 화폐로 환산하면 수백 엔 정도이다. 막부가 제시한 공정가격은 결국 지켜지지 않았고 색 수와 호리의 정교함으로 물가는 움직이고 같은 그림이라도 스리에 공을 들이고 가격을 꽤 높게 한 특별 제품도 만들어져 있다. 또, 인기 작품의 경우는 가격이 더 높았다. 이처럼 우키요에 판화 또한 다른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수요와 공급의 관계로 가격이 결정되었다.--- p. 201~202
우키요에 판화를 화집으로 보거나 미술관의 전시실
에서 유리 너머로 보는 것은, 실물 판화를 뒤집어서 종이에 물감이 깊이 스며든 모습을 직접 보거나 가라즈리를 살짝 (물론 깨끗이 씻은 손으로) 만져보고 그 감촉을 피부로 느끼는 것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우키요에 판화는 전통미술에서 이런 식으로 감상할 수 있는 많지 않은 장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에도의 서민예술이었던 우키요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서민예술로서 지위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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