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델리 국제 공항에 접근하고 있는 비행기 안에서의 일이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잘 차려입은 인도 사람이 입국카드를 좀 써달라고 부탁했다. 홍콩에서 탑승한 이 인도인은 터번 모(帽)를 썼고, 고급 향수 냄새를 풍겼다. 손에 낀 다이아몬드 반지는 내 평생 처음 보는 크기의 것이었다. 차림새로 보아 돈은 많이 보였는데 문맹인 모양이었다.
입국 카드의 항목대로 물어본 다음 써주었더니, 이 인도인은 묻는 말에 대꾸하면서 혼자말로 투덜대는 것이었다.
「나는 글 따위를 몰라도 백만 장자가 됐어. 이 세상에 글 따위를 만든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나는 속으로 웃으며 그의 입국카드를 건네주었다. 그러자 그는 고맙다고 말하면서 안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일백 달러짜리 지폐를 한 장 꺼내 주는 것이 아닌가. 순간 나는 발끈 달아오르는 모멸감을 느꼈다. 이러한 감정은 비단 나뿐만 아니라 그런 경우를 당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모멸감을 주기 위해 이 인도의 백만장자가 돈을 준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돈을 건네주고 건네받는 물리적 공간은 겨우 한 자 남짓도 안 될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지만, 그 전달에서 한국인과 인도인의 의식구조가 벌려놓은 심리적 공간은 몇백 리나 떨어진 아득한 것이었다.
물론 대서의 대가니까 받아도 되고, 한편으로는 받고 싶기도 했다. 대체로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오인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나라 체면이 깎일 것도 아니고, 인색하게 쓰면 열흘 동안의 숙식비가 해결되는 큰 돈이기에 궁기가 낀 이 해외 여행에서 횡재가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나는 정중한 거절로 돈을 돌려 주었다. 그랬더니 이 백만 장자는 웃긴다는 표정으로 창 밖을 내다보며 다시 혼자말을 하는 것이었다.
「세상에, 체면 따위를 지키는 자도 저주받을지어다.」
--- p. 101~
그러나 한국인의 집단적 능력은 집단을 이루는 구성원 가가자의 능력의 총화보다 커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를테면 집단 작업에서 열 사람이 각기의 힘을 내면 열 사람이 도합 100이라는 능력을 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120도 되고 150도 될 수 있다. 반대로 100이 못되는 90도 되고, 50도 될 수 있어 능력의 진폭이 커진다. 이 진폭의 상한을 이루게 하고 하한을 이루게 하는 요인이 바로 한국인에게 잠재된 집단의식을 유발했느냐 아니냐에 있는 것이다.
또 한국인은 집단 속에서 자기가 맡은 직무 이외의 고민이나 걱정을 해소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집단이 개인에게 플러스 가치를 부여하기도 한다. 서양 사람은 직장에서 맡은 자신의 직무나 직책 이외의 일에는 무관심하다. 어떤 서양인도 직장에서 자신의 가족적, 인간적, 사회적 고민을 해소시키거나, 그런 인생 문제를 집단에 의존하여 해소하려는 법이 없다.
--- p.186-187 핵에너지를 품고 있는 민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