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언하는 사람들에게 조언한다. 모르면 알려고 노력이라도 해라. 지금 주부로 사는 한국 여성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덜어낼 수 없는 이중 노동을 하는 자에게 휘게 실천이 얼마나 맥락 없는 조언인지, 여성 직원들이 비혼을 결심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지, ‘워킹맘’이 얼마나 눈치를 보는지, 왜 아직도 남성 직원이 육아휴직을 쓰면 눈치를 주는지, 후배들이 바라는 조직문화는 어떤 것인지….
--- 「조언하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조언」 중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 있는 중간자’가 아닐까. 윗사람에게 고무신 닦는 법을 배워서 닦아왔지만, 아랫사람에게는 시키고 싶지 않은 중간자, 불필요한 예절을 자기 선에서 끊어버릴 수 있는 최전방의 사람들. 세대 갈등에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낀 세대’의 역할이었다. 그들이야말로 철 지난 습관을 유연하게 떨쳐버리고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세대 간 대화를 주도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 「자기 고무신은 자기가 알아서 닦자」 중에서
언어에는 권력 관계가 담기기 마련이다. 만약 당신이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자기검열을 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꼰대가 되지 말아야지’라는 추상적인 다짐보다 ‘처음 본 사람에게 반말하지 말자’, ‘서로 동등한 언어 표현을 사용하자’와 같이 구체적으로 언어 가이드라인을 정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우리 한쪽만 반말하지 않기로 해요. 말 놓을 거면 둘 다 놓고, 아니면 둘 다 존대하자고요.
--- 「한쪽만 반말하지 않기로 해요」 중에서
정규교육을 받지 않아도, 대학을 가지 않아도, 학벌이 좋지 않아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계를 구축하는 똑똑한 사람들이 많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런 사람들을 최대한 많이 찾아 수면 위로 올리는 것이다. 이미 학벌 좋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데, 굳이 엔터테인먼트 업계에까지 학벌을 강요할 필요가 있을까. 좌우지간 어느 산업이던 간에 학벌과 배경이 다양한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 「고등래퍼와 방시혁과 학벌주의」 중에서
우리 주변에서 이런 외모 평가는 매우 흔하다. 안부 인사로 “너 얼굴 좋아졌다?”, “살 좀 쪘네?”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꺼내기도 한다. 가볍게 던진 이런 외모 평가는 조금씩 쌓여 사람들이 자신의 몸을 계속해서 대상화하게 만든다. 결국 혼자 있을 때도 우리는 자신을 끊임없이 모니터링하게 된다.
--- 「내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기를」 중에서
나는 비혼주의자다. 비혼을 선택한 이유는 결혼제도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삶이 나와 잘 맞기 때문이었다. 나는 혼자 있는 시간에 가장 큰 충만함을 느끼는 사람이다. 이걸 알아가는 데 20대 전부를 보냈다. 10년간 홀로 자취도 하고, 동거 수준으로 타인과 살아보기도 하고, 1년 동안 타지에서 홀로 여행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확신을 얻었다. 나는 나만의 고독이 필수인 사람이라는 것을.
--- 「이런 비혼 생활을 꿈꾼다」 중에서
그래서 감히 나는 연속극을 지지한다. 다만 연속극의 개혁을 꿈꾼다. 어쩌면 연속극의 개혁이야말로 밥상머리에서부터 세대 갈등을 줄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지도 모른다. 안동에 계신 조부모님에게 요즘 세상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알려줄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 우리 사이에 놓인 은하수가 좁아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
--- 「주말 드라마가 세상을 바꿀 방법」 중에서
결국 답은 간단하다. 종의 위계를 세우는 구조 자체를 거절하면 된다. 어떤 동물에게도 ‘전시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해파리든, 멸치든, 그 목적이 인간의 재미와 감동, 눈요기를 위해 전시되는 것이라면 수용해서는 안 된다. 벨루가는 안 되고, 불가사리는 된다? 그런 위계의 기준을 세우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필연적으로 부딪히게 된다. 어떤 것은 되고, 안 되고를 고려하는 이분법 사고는 ‘관람’의 비윤리성을 흐린다.
--- 「수족관 아포칼립스」 중에서
세상은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고, 세계의 불의와 고통에 우리는 얼마간의 책임이 있다. 완벽한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보단 페미니즘적 사고로 살아가는 것, 한 명의 그레타 툰베리가 존재하는 것보단 다수의 사람이 ‘툰베리적’으로 환경문제에 동참하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 완벽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적어도 이것 하나만큼은’ 시도하고, 그 ‘하나’를 ‘둘, 셋’으로 늘려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지금 이 세상도 어설픈 사람들의 사소한 시도로 조금씩 확장된 결과일지 모른다.
--- 「완벽하지 않은 채식주의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