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미오: (줄리엣의 손을 잡으며) 저의 미천한 손이
이 신전을 모독한 것이라면, 얼굴 붉힌 두 순례자 같은
제 입술이 부드러운 입맞춤으로 더럽혀진 곳을
씻고자 하는 것은 가벼운 죄에 불과하겠지요.
줄리엣: 착한 순례자님, 손을 너무 부당하게 대하시는군요.
이처럼 착실히 헌신을 다하고 있는데 말이에요.
순례자들이 손으로 만지는 성상에도 손은 있고,
손바닥을 서로 맞대는 것이 순례자들의 입맞춤이죠.
로미오: 성상에 입술은 없나요? 순례자들에게도?
줄리엣: 아, 순례자님, 입술은 기도할 때 써야죠.
로미오: 아, 성상이여, 그러면 손이 하는 것을 입술이 하게 해주세요.
믿음이 절망으로 변하지 않도록 입술이 기도하게 해주세요.
줄리엣: 기도를 들어 주더라도, 성상은 움직이지 않아요.
로미오: 그럼 제가 기도의 효험을 받을 동안 움직이지 마세요.
(로미오가 줄리엣에게 키스한다)
이제 당신의 입술이 제 입술에서 죄를 씻어 주었네요.
줄리엣: 그럼 그 죄가 제 입술에 있겠군요.
로미오: 제 입술에 있던 죄요? 아, 잘못을 감미롭게 꾸짖는군요!
제 죄를 다시 가져갈게요.
(로미오가 줄리엣에게 다시 키스한다)
--- p.46쪽
줄리엣: (로미오를 보지 못한 채) 아, 로미오, 로미오, 당신은 왜 로미오인가요?
아버지를 부정하고 당신의 이름을 버리세요.
그럴 수 없다면 내게 사랑을 맹세하세요.
그러면 나는 이제 캐풀렛 가문을 포기할게요.
(……) 당신의 이름만 내 원수일 뿐이에요.
몬터규가 아니어도 당신은 그대로죠.
몬터규란 무엇인가요? 그건 손, 발,
팔, 얼굴, 신체의 어떤 부위도
아니에요. 아, 다른 이름이 되세요!
이름이란 무엇인가요? 장미는 이름이 바뀌어도
그 달콤한 향기는 변치 않으니
로미오 또한 로미오로 불리지 않아도,
그 명칭이 없어도, 그의 소중한 완벽함은
그대로일 거예요. 로미오, 당신 이름을 버리세요.
당신의 일부분이 될 수 없는 그 이름 대신에
나의 전부를 가지세요.
--- p.56
로미오: 베로나 바깥에 이 세상은 없어요.
연옥이자 고문이고, 지옥 그 자체죠.
그러니 추방은 이 세상에서의 추방이고,
이 세상에서의 추방은 죽음이죠. 추방은
[죽음]의 잘못된 표현이에요.
(……) 이건 고문이지 자비가 아니에요. 줄리엣이
살고 있는 여기가 천국이에요.
모든 고양이, 개, 작은 생쥐, 하찮은 미물들도
이곳 천국에 살며 줄리엣을 쳐다보는데,
로미오는 그럴 수 없잖아요. 시체에 붙는
파리들이 로미오보다 더 멀쩡하고
더 명예롭게, 더 절도를 지키며 살아요. 그것들은
줄리엣의 경이로운 하얀 손 위에 앉고,
순수한 처녀의 수줍음 때문인지
위아래가 맞닿는 것조차 죄라 여겨 늘 발그스레한
그 입술에서 불멸의 축복을 훔칠 수도 있죠.
하지만 로미오는 추방됐으니 그럴 수 없어요.
--- p.104~105
로미오: (……) 아, 사랑하는 줄리엣,
그대는 왜 이렇게 여전히 아름다운가요?
저 실체 없는 죽음이 사랑에 빠져, 저 깡마른
혐오스러운 괴물이 그대를 자신의 애인 삼으려
이 어둠 속에 붙잡아 두고 있는 걸까요?
그럴까 두려우니, 내가 항상 그대 곁에 머물며
이 어두운 밤의 침대를 결코
떠나지 않겠어요. 난 여기, 이곳에서
그대의 침실 시녀인 구더기들과 있을게요.
아, 이곳을 영원한 내 안식처로 삼아
세상에 지친 이 몸에서 불길한 별들의 속박을 떨쳐 낼게요.
두 눈아, 마지막으로 봐두어라.
팔들아, 네 마지막 포옹을 해라.
아, 숨결이 드나드는 입술아, 제대로 된 입맞춤으로
뭐든 삼키는 죽음과 영원한 계약을 맺어라.
--- p.1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