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홍성중, 예산농고를 거쳐 대학에서는 중국어와 장례풍수학을 전공했다. 종교신문 취재부장, 세계종교신문 주필, 월간 광장 편집장과 세계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을 역임했다. 중학시절 충청지역 명풍수 유효동 선생과의 인연으로 풍수학에 입문한 뒤 화엄학의 태두 탄허대종사로부터 주역과 명리를 인가받고 황진경 조실 스님에게서 사찰풍수를 전수받았다. 현역 취재 30여 년간 종교와 풍수전문 대기자로서 다양한 기사와 글을 써왔다. 1995년 문예사조지 시 부문 신인상을 타며 문단에 등단한 후 제6회 부원문학상과 제27회 한국기자상 본상(출판저작 부문), 제34회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 종묘제례 전수자이고, 사단법인 한국언론인연합회 사무총장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전통 예인 백 사람』, 『대한민국 명당』, 『한국사찰순례』(공저), 『한국의 차세대』(공저) 등이 있다.
영릉은 풍수를 운위함이 외람된 천하제일의 명당이다. 원래 이곳은 세조 때 대제학을 지낸 광주 이씨 이계전과 영의정을 지낸 이인손의 문중묘였다. 평안도 관찰사로 있던 이인손의 맏아들 이극배를 예종이 불러 자리양보를 청하니 가족들과 상의해 응해주었다. 당시 이인손의 묘를 파묘하니 “이 자리에서 연을 날려 높이 오르거든 연줄을 끊고 그 떨어지는 자리에 묘를 모셔라”는 글귀가 나왔다. (중략) 자좌오향은 3대를 적선해도 차지하기 힘들다는 대길 터다. 영릉가백년英陵加百年이라 하여 세종대왕을 이곳에 모신 이후 조선왕조의 운세가 백여 년이나 연장되었다고 한다. --- p.86
회묘에 가면 두 번 놀란다. 조선 역대 어느 왕릉 못지않은 규모임에도 ‘왕릉’이 아니라 ‘묘’라는 사실과 이런 ‘능’ 앞에 정자각은커녕 사가 묘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비석조차 없다는 것 때문이다. 근무자의 안내 없이는 ‘희한한 능’ 쯤으로 지나치기 십상이다. 이 모두가 자식을 잘못 둔 탓이다. 폐비 윤씨와 연산군은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었다. --- p.194
제2계비인 태릉의 문정왕후 역시 파평 윤씨로 제13대 명종의 생모가 된다. 문정왕후는 고약한 마누라였다. 1544년, 19세로 등극한 중종이 보령 57세로 재위 38년 2개월 만에 승하했다. 처음 중종은 서삼릉에 있는 장경왕후 옆에 묻혀 희릉이라 했는데 계비 문정왕후가 이 꼴을 못 본 것이다. 결국 명종 17년(1562) 시아버지(성종)와 시어머니(정현왕후)가 있는 선릉 왼쪽에 억지로 이장했다. 문정왕후 자신도 이곳에 묻히려 했지만 흉지임을 알고 마음을 접었다. 결국 중종과 이들 세 왕비의 능 모두 단릉이 되었다.
조선왕릉은 그 자체로 장엄한 건축이자 조경이다. 삶의 공간이 아니라 죽음의 공간을 성스럽게 조성해냄으로써 조선왕조 사람들의 삶과 죽음과 자연에 대한 사상을 이상적으로 표현해낸 곳이다. 그리고 각 능에는 왕과 왕비의 삶 자체뿐만 아니라 역사의 주인공으로서 그 시대를 상상케 하는 무수한 스토리텔링이 서려 있다.
이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남한의 조선왕릉 40기를 포함, 그동안 다루지 못했던 왕족의 무덤 9기를 일일이 현장 답사하고 취재해서 조선 오백 년 왕실의 역사를 재조명한다는 일은 누가 해도 할 일이다. 이런 일의 적임자가 역사가일 수도, 문화연구가일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문화와 역사에 깊은 애정을 가진 저자가 조선왕릉을 친절하게 안내하며 조선의 역사를 되돌아보았으니 그 뜻이 남다르다고 하겠다.
저자는 이 고달프고 힘든 일을 자원하여 철마다 모습을 달리하는 사진까지 곁들여 충실한 왕릉안내서이자 역사서로서 『조선왕릉실록』을 펴냈다. 조선왕릉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이 한 권의 책은 우리 문화유산들이 형식상의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그 안에 서린 인문정신까지 말할 수 있을 때 진정한 가치를 얻게 된다는 점을 생각하게 해준다. 유홍준(전 문화재청장·명지대 교수·『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