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인류 역사가 20세기의 여명기에 도달했기 때문에 역사의 어두운 그림자가 점차 사라져갈 것으로 기대되었다. 바야흐로 인류의 역사는 문명의 황금기에 들어선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이단자란 명목의 마녀사냥으로 인해 화형을 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또한 음주가나 술주정뱅이에게 사용하던 '외투'나 '재갈'을 무서워할 것도 없다. 자백을 받아내는 수단이었던 고문은 미국의 소설 '제3급'에 관한 소문을 사실로 인정하지 않는 한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태형은 여전히 존속되고 있으나, 영국에서는 폭행구타의 죄나 미성년자의 경우에 적용될 뿐이다. 또한 20세기 초에는 '제1급 야전형벌'이 군법으로 허용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제1차 세계대전에 의해 제한됐고, 지금은 이 형벌과 함께 '백드릴'도 행해지지 않고 있다. 모든 가혹한 고문은 20세기에 들어와 점차 사라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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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욕에 의한 형벌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것은 루이 11세 치세 동안 프랑스에서 널리 이용되었던 나무통 감옥이었다. 형벌의 방법으로 '통 감옥'이 언제 가장 먼저 이용했는가를 탐구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1306년 바칸 백작 부인은 부르스를 위해 열심히 활약을 해 그의 머리 위에 왕관을 씌워 주었는데 에드워드 왕의 명령으로 바윅 성 안의 탑에 있는 통 감옥에 감금되고 말았다. 통 감옥은 왕의 옥새가 찍힌 편지로 제작명령이 내려졌다. 격자 모양으로 세공한 아주 튼튼한 통이었다. 이 통 감옥 안으로 들어간 백작 부인은 엄중한 감시를 받았고 그녀의 주위에서 시중드는 여자 이외에는 누구와도 말할 수 없었다. 부르스의 누이 메리도 록스버러 성에서 같은 운명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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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에 의한 고통의 크기는 고문에 사용되는 여러 가지 형벌 도구의 종류와 그 회수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예증할 수 있는 실례는 많이 있어서 이 책에서도 이미 몇 가지를 서술했다. 프란시스 다미안의 고문기록은 좋은 예이다. 다미안은 1757년 1월 5일에 프랑스 왕 루이 15세의 오른쪽 복부를 찔러 암살을 기도했지만 붙잡혀서 고문을 당했다. 그의 사형 선고는 고문의 연속으로 서론에서 기술한 라바약의 경우와 비슷하다. '고문을 통해 다미안이 받은 찢어진 상처는 마침내 죽은 피부로 변했다.
그를 담당하는 외과의사는 그가 제대로 살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는 판결대로 처형을 받으러 감옥 밖으로 끌려나왔다. 즉, 형장 운반수레에 실려 오른손에는 나무 횃불을 잡고 교회의 문 앞까지 운반되고 거기에서 자신이 대죄를 지었다는 것을 고백했다. 이어서 그를 처형장까지 끌고 간 다음 교수대에 매달고 불에 달군 가위로 가슴과 팔, 다리, 넓적다리의 살을 잘라 내었다. 불에 녹인 납이나 끓는 기름, 끓인 역청 등을 몸에 부었다. 또한 암살을 기도한 한쪽 손을 유황불에 태운 다음에 네 마리의 말에 몸을 묶어 갈기갈기 찢어지도록 했으며 떨어져나간 팔다리나 몸은 불에 태우고, 그 재는 공중에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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