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이 되는 기쁨 중에 가장 큰 기쁨은 당연히 예수를 통한 인간과 세상의 구원 가능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부수적으로는 역사에 드러난 인간 예수와 그의 사유를 성찰하며 그와 대화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지 싶다. 기독교인이 되는 이러한 기쁨을 확인하면서 다른 기독교인은 물론 비기독교인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는 것이 애초에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였다. 뒤늦게 기독교에 입문한 어느 진보주의자의 예수찾기 정도를 목표로 했다.
여전히 예수가 ‘참신이자 참인간’임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나에게 있는 건 그가 그일 것이라는, 믿음보다는 희망에 가까운 마음이다. 믿음은, 의심과 미망 속에서 행하는 그를 향한 나의 말걸기가 끝내 외면당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마침내 어느 순간 응답받으리라는, 두려움과 긴장 위에서 작동하는 희망을 통과하여 만나게 된다.
신은, 인간이 단박에 파악해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뒤 내용과 행태를 제시할 수 있는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신은 그를 찾고자 하는 사람 앞에 그에게 도달할 수 있는 길을 기꺼이 보여주지만, 내 생각에 그 길은 항상 미로이다. 성서라는 인간의 언어로 된 텍스트 또한 그 미로의 한 형태다. 그중 계시의 가장 유력한 가능성의 하나로 제시된 현존 성서에서조차 해석의 무한한 다층성이 발견되며 그 속에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도움 아래 자신에겐 적합한 경로를 찾아 나선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꼭 성서를 통해서만 나에게 말을 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생각에 세계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성서로 그는 세계를 통해서도 나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다.
동일인이든 아니든 예수가 하나님의 기획 전체를 알고 있었다면, 부활하여 승천할 것까지 미리 계획하고 인지하고 있었다면, 그 십자가 사건은 역사상 가장 거대한 ‘할리우드 액션’이 된다.
큰 걱정거리는 “우리는 신천지가 아니고, 우리는 전광훈 교인이 아니다.”라는 말속에 있다. 예수의 더 큰 우환은 신천지와 사랑제일교회를 뺀 한국의 기독교이지 않을까.
하나님의 ‘너’가 왜 자신이 하나님의 ‘너’인지 알 수 없듯이, “하나님의 ‘너’가 아닌 이”들도 왜 자신들이 하나님의 ‘너’가 아닌지를 마찬가지로 알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우리는 또 다른 논란과 마주치게 된다. 이 논의를 진행하기 전에 짚고 넘어갈 것은 언제나 인간이 문제라는 점이다. 하나님과 예수에겐 문제가 없다. 위로부터 전부를 보여준다고 하여도 인간은 아래로부터 볼 수 있는 것만을 볼 수 있을 따름이다. ‘볼 수 있는 것’의 범위는 또 다른 신학적 논의의 주제로 여기서 다루지는 않는다. 지금의 또 다른 논란은 어쩌면 ‘범위’와 관련된다고 할 수 있는데, 십자가의 사건에 혹시 편한 말로 ‘할리우드 액션’이 개입한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다.
심층적이고 전문적인 연구를 거쳐야 할 영역이지만, 신학자가 아닌 일반인의 눈높이에서 예수의 죽음을 고찰해보면, 일단 ‘할리우드 액션’은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수는 진짜로 끔찍한 고통 속에서 인간처럼 죽어갔다.
예수가 이중인격이라는 성격장애를 겪었을까. 어떤 사람이 보기에는 또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그런 판단을 내릴 개연성이 없지는 않다. 그런 판단은 예수에게서 신성을 완전히 배제했을 때 가능하다.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정신병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같은 인간적인 관점 아래에서도―사실 ‘인간적인 관점’이란 표현은 무의미하다. 우리에겐 신적인 관점이 불가능하기에 그렇다면 당연히 인간적인 관점만이 주어진다. 다만 그것이 맞는 것인지 틀린 것인지를 확인할 수 없다는 한계 아래에서 우리가 신적인 관점을 상상할 수는 있다―인간 예수에게 당연히 존재할 인성 외에 어떤 식으로든 신성이 함께 존재한다는 전제를 수용하는 순간 이중인격 논의는 무용해진다.
이스라엘이 선민이란 주장은 유대인이 ??구약성서??를 작성한 연유로, 즉 예수 이전 시대에 하나님의 흔적에 관한 아마도 유일한 기록을 남겼다는 이유로 인해 이스라엘 외의 다른 ‘너’들이 주목받지 못한 상황이라고 생각할 법도 하다. 그리하여 ??신약성서??에 이르면 ‘나와 너’의 구조는 마침내 하나님과 인류 전체 간에 성립하는 것으로 분명하게 선포된다. 게다가 내가 생각하기에 이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방식은 진정한 ‘나와 너’로 바뀌었다.
다시 말하자면 모세는 염전이자 소금이다. 신적인 존재에서는 특수성과 보편성이 동시에 실현되기 때문이다. 상응하여 모세가 실존 인물이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커질 수밖에 없다. 만일 실존 인물이었다면 한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복수의 인물이었는데 그들의 이야기가 하나의 전승으로 만들어졌을까 하는 또 다른 의구심이 뒤따라온다.
--- 본문 중에서
동시에 정신분열적이고 가학적이며 폭력성에 사로잡혔다는 신(神)의 혐의 또한 벗겨진다. 신이 그런 신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런 인간이었던 것이다.
유대교를 현실 세계에 안착시킨 사람들은 아브라함·이삭·야곱과 모세를 현재 토라의 형태로 유대인 공동기억 안에 주조(鑄造)하느라 혼신의 힘을 다했고, 그 결과 어디로 갈지 어떤 모습으로 굳을지 짐작할 수 없던 끓어오른 용암 같은 액체성의 역사는 하나의 경로로 고체화하여 예수와 그의 동시대인 앞에 지반(地盤)으로 놓였다. 아무 때고 역사성을 훌쩍 뛰어넘을 수 있는 종교의 관점을 배제한 채 철저히 세속화의 관점을 취하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유대인들에 의한 역사의 날조처럼 보일 터이다. 내 생각은 다르다. 그것은 날조된 역사가 아니라 주조된 역사이다. 분명 진짜 역사가 아닐 가능성이 크지만 진짜 역사를 영원히 알 수 없기에 진짜로 믿어진 또는 더 정확하게 진짜로 주조된 역사 말고는 어떤 역사도 진짜 역사로 주어질 수 없다. 주조 과정에서 거품을 빼지 못해 형태의 결함을 노출할 수는 있겠지만 형태만은 결함 없는 ‘진짜’인 셈이다. 주조 행위와 주조 틀을 통하여 산출된 고유한 형태는 부인할 수 없는 역사이며 그것이 새로운 역사의 무대를 구성한다.
마르틴 부버가 말한 ‘나와 너(Ich und Du)’ 상호 호명에 근거한 거품 없는 직접성, 다른 누구 혹은 무엇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는 배타적 연결을 뜻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불순물을 허용하지 않는 직접성의 연결의 주체가 언제나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신이 “너희의 하나님이 되겠다.”라는 신의 결단이 선행한다. 하나님이 항상 ‘나(Ich)’이다. 하나님이 ‘너(Du)’가 되는 일은 없다.
그 전에 많은 교회가 죽어야 한다. 옛것은 죽고 새것이 태어나야 한다. 옛것이 아직 살아있고 새것은 온전하게 태어나지 못한 사이를 소망을 품고 견뎌내는 한편 옛 괴물과 막간에 등장하는 변용 괴물에 맞서 싸우는 것이 원래 기독교 정신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안타깝게도 주어진 확신 말고는 확신할 다른 어떤 방법도 없다.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그 확신은, 독단에 빠진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삶을 반성하고 신앙을 점검하는 길 위에서 이루어져야 올바른 확신에 다가갈 수 있다. 마침내 실존적 고독 안에서 스스로 신을 대면해야 하겠지만, 성서와 교회로부터 받는 감화와 소통이 자신의 대면과 그것에서 연유한 신앙을 점검하는 잣대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절대순종의 철칙 아래 불순종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온갖 재앙을 내리는 신. 이런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들이 이해한 하나님의 뜻을 표현했는데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곡해하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이러한 의심은 신에 대한 의심이라기보다는 신에 대한 신뢰를 지속하려는 자기보호기제일 수 있다. 즉 하나님이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의 발로이다.
은과 금은 없더라도 일어나 걸으라고 할 권능을 지닌 베드로를 되찾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 아니다. 그것으로도 부족하다. 우리에겐 무엇보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필요하다. 극단적으로 말해 베드로는 없어도 되지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