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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 세자의 진짜 공부 (큰글자도서)
중고도서

소현 세자의 진짜 공부 (큰글자도서)

설흔 | 라임 | 2021년 01월 15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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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1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220쪽 | 199*280*20mm
ISBN13 9791189208684
ISBN10 1189208687

중고도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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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   수뗑이   평점4점
  •  특이사항 : 출간 20210115, 판형 199x280, 쪽수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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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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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 경보가 발령된 한낮의 강변, 버드나무 아래 그늘 속에서 쉬고 있는 내 곁으로 낯선 남자가 밀고 들어온다. 언젠가 만난 적이 있지 않느냐 묻는 남자의 말에 고개를 젓자, 대뜸 초코파이를 건넨다. 나는 남자에게 친근함을 느끼고, 통성명을 하는 과정에서 남자가 기억을 잃었다는 걸 알게 된다. 내가 신원 불명인 그에게 존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자, 존은 나에게 낯설고 기이한 먼 과거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한다. 존은 자신을 ‘소현 세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의아해하면서도 묘한 기시감이 드는 그의 이야기에 조금씩 빠져든다.

무엇보다도 지금 내가 힘주어 이야기하려는 건 아버지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내 공부의 실패에 대한 가감 없는 분석과 인정이니까요. 결과적으로 보면 스승들의 말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다 옳았습니다. 내 게을렀던 공부는 결국 어느 스승이 예견했던 대로 천하의 혼란과 멸망에 버금가는 끔찍한 결과를 야기했으니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황제 또한 내 게을렀던 공부의 이력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대청국 황제다운, 다이칭 구룬의 신성한 칸다운 혜안으로 이제는 속국이 된 나라에서 온 세자의 병증을 속속들이 다 파악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랬기에 관대하고 자애로운 황제는 특별히 나를 따로 불러 너는 우리에게 패배를 했으면서도 왜 만주어를 공부하지 않느냐는, 네 백성을 다 망하게 했으면서도 여전히 그 모양 그 꼴이냐는,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드는 따끔한 질책을 베푼 것이겠지요.
---「강변에서 시작한 공부」중에서

자신의 무능과 게으름으로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고통을 받았다고 고백한 존을 다시 만난 것은 삼전도비가 세워진 소공원 근처의 놀이공원에서였다.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던 나는 자연스럽게 존과 동행한다. 존은 얼음보다 더 차갑고 냄새나는 삼전도의 검은 진흙 바닥에서 이국의 새 아버지를 맞이하며 행한 삼배구고두의 예와 이후 이어진 만주족 특유의 잔치를 비롯해 창덕궁 어수당, 선양성에서 경험했던 여러 잔치 이야기를 차례차례 꺼낸다.

삼배구고두의 예를 마친 아버지와 내가 황제의 허락을 받고 단 위에 올라 여러 친왕들 사이에 자리를 잡자, 얼굴이 남보다 길어 때론 몹시 사색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황제는 우리를 보며 만주어로 무언가를 말했습니다. 여러 친왕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습니다. 나는 그냥 있기 멋쩍어 아주 살짝, 뭐가 좋아서 웃느냐는 식으로 책잡히지 않을 정도의 미묘하고도 외교적인 미소를 부드럽게 지었습니다. 하지만 조선 출신 역관을 통해 곧바로 전해 들은 황제의 말에, 이제는 두 나라가 한집안이 되었다는 그 명쾌한 족보 정리 내지 친족 결합 선언의 말에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쌀밥 먹다 돌을 씹었으나 보는 눈이 많아 뱉을 수도 없는 애매한 표정만 지어야 했지요. 흘낏 본 아버지 또한 나와 비슷한 표정이었다는 것을 당신에게 꼭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그렇기에 그가 내 아버지이고 내가 그의 아들이겠지만 말입니다.
---「놀이공원에서 이어 간 공부」중에서

그다음으로 존을 만난 곳은 애증의 장소이자 운명의 장소라고 할 수 있는 남한산성 인근에서였다. 이전보다 더 야위고 추레해진 존에게 생선구이가 곁들여진 식사를 대접하자, 그는 황제가 하사했던 생선 ‘아지’와 그로 인해 벌어졌던 의미심장한 사건을, 그리고 고난이 차례로 덮쳐 옴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남한산성에서의 무력함을 떠올린다.

나는 그 문서가 도착했을 때 곧장 황제에게 달려가야만 했습니다. 혹여 만류하는 이들이 있다면 다 뿌리치고 황제에게 나아가 차가운 바닥에 납작 엎드리고 머리 세게 박으며 항복했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내 직분에 어울리는 유일하게 정의로운 행위였습니다. 당신도 잘 알다시피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오직 하나, 내가 어리석었기 때문입니다. 공부도 잘 못하고 안 하는 아이였던 나는 머리 또한 매우 우둔했기 때문입니다.

(중략) 그러나 아버지의 자신감은 강화도로 피난 가려다가 길이 막혀서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려 남문을 통해 산성에 들어온 그 순간부터, 아니 궁궐 문 앞에서 도무지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몰라 허둥지둥하던 그 순간부터 연기가 되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냉정히 말하겠습니다. 아버지는 두려움에 떠는 범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경전도 제대로 읽지 않은 채 요행만 바라고 과거장에 들어선 풋내기 응시자에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늘과 명분과 운에 모든 것을 맡기려던 지극히 평범하고 오활한 사람이 도망자의 선두에 선 조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 이후의 날들에 대해 더 말할 게 도대체 뭐가 있겠습니까? 그저 이미 예정되었던 고난, 또 고난만이 차례로 다가와 무방비 상태인 우리 등을 죽비로 세게 가격했을 뿐이지요.
---「산성에서 깨달은 공부 2」중에서

시위자와 경찰이 대치하고 있는 뜨거운 광장에서 존은 나와 처음 만났을 때 했던 이야기를 다시 꺼낸다. 그리고 자신이 선양성에서 얼마나 많은 죽음을 지시하고 목격해야 했는지를 고백한다. 그 고백은 ‘나’와의 일화로 이어졌고, 나는 선양에서 조선으로 돌아온 소현 세자의 최후를 떠올리며 실패의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는 상념에 젖어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이라는 시구를 떠올린다.

나로서도 다른 도리가 없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 말도 맞기는 하지요. 대놓고 조선과 청을 배반한 자, 만주족이 돈을 주고 산 정황이 확실히 드러난 자를 살릴 도리는 없었으니까요. 그런 이들을 살리려고 애를 썼다간 더 큰 화를 불러올 게 분명했으니까요. 그런 내 행동이야말로 용골대가 나를 시험하면서 보기 원했던 것이었으니까요. 나는 대의를 생각해야만 했습니다. 작은 일에 흔들리지 않고 내게 주어진 일, 그러니까 조선과 다이칭 구룬을 잇는 가교 역할을 꿋꿋하게 수행해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내가 그들을 죽였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생사여탈권을 지닌 내 한마디에 그들의 모가지가 곧바로 저승으로 향했다는 것은 천년만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명확한 사실이지요.
---「광장에서 몸으로 느낀 공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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