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파에서 시작한 근대적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은 이 ‘부’와 ‘상품’을 구별하지 않고 동일시한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의 부는 방대한 상품 더미로 나타나며’라는 표현에는 부는 모든 시대와 모든 사회에 존재하지만, 부가 주로 ‘상품’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뿐이라는 주장이 담겨 있다. 부와 상품을 섞어버리면 부라는 초역사적 개념이 곧 상품이라는 말이 되며, 상품도 초역사적인 것이 된다. 그러면 원시시대부터 자본주의가 존재했고 자본주의는 영원히 지속된다는 말이 되는데, 마르크스는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 p.43
신자유주의는 이제 특정한 경향을 가진 정치경제 정책이라기보다 종합적인 세계관을 부여하는 하나의 문명이 되었다. 신자유주의적인 가치관에 따르면 사람은 자본에 도움이 되는 기술이나 능력을 갖추어야 비로소 가치를 갖게 된다. 인간의 기본적 가치,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지니는 가치나 꼭 돈이 되지 않아도 여전히 유효한 가치는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을 자본에 봉사하는 도구로만 보는 것이다. --- p.67
소비자는 수동적이다. 소비자의 태도를 가진 학생은 대부분 지루한 표정으로 수업에 임한다. 아마도 인생이 지루한 것일 테다. 그들은 스스로 재미있는 것을 찾아서 배우자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 재미있고 신나는 게 굴러와 자신을 즐겁게 해줘야 한다고 여긴다. 선생님이 하는 이야기가 재미없거나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도 자신의 배움이 부족해서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소비자가 된 학생의 모습이다. --- p.97 새로운 기계가 연달아 발명되고 기술은 점점 발전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의 노동을 편하게 하거나 생활을 편리하게 하려는 선의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물론 발명한 사람은 그런 선의를 가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회 시스템 측면에서 보았을 때는 그런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잉여가치 생산을 위해, 즉 자본 증식을 위해 발명된다. --- p.106
마르크스가 제기한 테마 중 하나가 자본제와 노예제 문제다. 근대사회는 자유·평등·인권을 내걸고 사람에 의한 사람의 지배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인격의 존엄을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이야기이며, 자본에 의한 노동자 지배라는 현실이 존재하는 한 우리 사회는 노예제의 흔적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과거의 노예제와 여전히 잇닿아 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 p.128
혁신은 인간을 행복하게 할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특별 잉여가치를 획득하기 위한 것이다. 특별 잉여가치를 획득하려는 충동에 사로잡혀 끊임없는 기술혁신이 진행되고, 이 경쟁은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된다. 세계 각국에서 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아등바등하는지도 모르는 의미 없는 경쟁이 계속되고 있다. --- p.140
보통 일본의 고도성장이 끝난 이유로 석유파동을 꼽고는 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본질적인 이유는 농촌의 과밀인구에 기반한 노동력을 다 써버렸기 때문이다. 고도성장기에 취직 열차를타고 도시에 와 공장에서 일한 지방 출신 중졸 소년, 소녀들의 값싼 노동력이 고도성장을 지탱한 기반이었던 것이다. 아시아에서는 일본 다음으로 한국과 대만이 고도성장의 파도를 탔고, 그다음으로는 중국이 크게 발전했다. 지금은 동남아시아가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 나라들이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일본과 완전히 같다. 그러므로 이 나라들의 고도성장도 일본과 같은 이유로 이윽고 종말을 고할 것이다. --- p.204
몇 년 전, 미국의 저명한 투자가인 워런 버핏(Warren Buffett)은 [뉴욕타임스] 칼럼에서 자신의 비서가 부담하는 세율이 자신이 부담하는 세율보다 높다고 밝혔다. 버핏은 매년 어마어마한 돈을 버는, 한때는 세계 제일의 부자로 꼽히던 자본가의 표상이다. 그가 고용한 비서는 평범한 급여를 받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세율은 버핏이 더 낮다는 것이다. --- p.206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국가권력과 법이 직접적으로 수탈을 하지 않는다. 봉건사회에서는 윗사람이 세금을 얼마만큼 납부하라는 규정을 만들고 그것을 법으로 제정한다. 법이 곧 수탈 도구다. 하지만 자본제 사회에서 법과 정치권력은 등가교환이 제대로 이루어지는지 지켜보다가 위법 행위가 발견되면 그때 등가교환이라는 규정의 실효성을 보장하기 위해 징벌을 내린다. 파슈카니스는 그 점을 파악하고 정치적 사회와 경제적 사회가 분리돼 별개가 되는 것이 자본제 사회의 특징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