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2018년 6월 30일 일본이 추천한 ‘나가사키(長崎)와 아마쿠사(天草) 지방의 잠복(潛伏) 기리시탄 관련 유산(Hidden Christian Sites in the Nagasaki Region)’을 세계문화유산에 등록하기로 결정했다. 위원회는 이 유산에 대해 ‘막부의 금교정책 아래에서 남모르게 육성된 독특한 종교적 전통을 말해준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유네스코의 세계유산 선정 기준인 ‘현저하며 보편적인 가치’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잠복 기리시탄(Hidden Christian), 세계그리스도교회사에서도 유례(類例)가 없는 명칭이다. 에도 시대와 메이지 시대 초기(17세기 초 ~ 19세기 말), 막부와 정부의 혹독한 금교정책 아래에서도 신앙을 유지한 크리스찬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사제의 지도를 받을 수도 없었다. 사제들은 이미 추방됐거나 순교했다. 이들은 스스로 조직을 구성하고 지도자를 세웠다. 그리고 철저하게 불교도 행세를 했다. 이들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관원들의 단속을 피해야 했다. 간혹 관원들에게 적발되는 기리시탄들도 있었다. 적발된 기리시탄들은 순교를 당하기도 했고 모진 고문을 받아야 했다.
‘나가사키와 아마쿠사 지방의 잠복 기리시탄 관련 유산’은 그리스도교가 일본에 전해져 뿌리를 내리기까지 겪어야 했던 혹독한 탄압과 박해를 딛고 형성된 유산이다. 유럽에서 발전한 크리스트교가 문화적 토양이 전혀 다른 일본에 전해지면서 빚어진 문명충돌의 양상과 그 고난을 이겨내고 끝내 신앙을 지켜낸 일본 크리스찬들의 찬란한 승리를 잘 보여준다.
---「머리말」중에서
일본에 남겨진 피로인들 가운데 일부는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가기도 했다. 도자기 등을 만드는 기술자들은 특별한 대우를 받으며 정착해 일본 도자기 문화의 장을 열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피로인들은 잡역에 종사하며 열악한 삶을 이어가야 했다. 그런 조선인 피로인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졌다. 조선인 기리시탄들이 여기저기서 생겨났다. 그들은 모여 사는 마을에 교회를 세우기도 했고 순교의 대열에 합류하기도 했다.
한국 천주교회의 첫 역사서는 1874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달레(Dallet, CH.) 신부가 프랑스어로 간행한 ‘조선천주교사(Histoire de l’Eglise de Coree)’이다. 이 책은 조선에 대한 정보가 빈약했던 당시의 유럽 세계에 조선에 대한 기초 정보를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 한국천주교회사의 귀중한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책은 조선천주교회의 성립에서부터 1866년 병인박해까지의 일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은 서두에서 조선천주교회의 전사(前史)로 임진왜란 피로인들의 신앙과 순교 사실을 소개하고 있다. 조선인 기리시탄들에 관한 내용은 당시 일본에서 활약하던 선교사들에 의해 바티칸에 보고돼 있었다. 달레 신부는 이 자료들을 조선천주교회사를 기술할 때 빠뜨리지 않았다.
---「조선인 기리시탄의 탄생」중에서
1867년 7월 7일 교황 비오 9세는 일본에서 순교한 205위를 복자로 시복했다. 이때 시복된 순교자들은 1617년부터 1632년까지 희생된 사람들이었다. 박양자 수녀는 도쿄대교구청에서 나온 자료와 각 수도회에서 나온 자료를 토대로 이 가운데 조선인이 10명 포함됐다고 저서에서 밝혔다. 이 가운데 안토니오 고라이(高麗)라는 인물이 있다. 일본에서 성(姓)을 고라이(高麗)라고 했던 이 조선인 기리시탄은 부인, 아들 두 명과 함께 복자위에 올랐다. 안토니오 고라이 일가족은 1622년 9월 10일 니시자카(西阪) 언덕에서 55명이 순교할 때 화형에 처해졌다. 이때 안토니오의 아들은 12세와 3세였다. 고려교 옆에는 큼직한 석등 하나가 자리를 잡고 있다. 나카시마가와가 지류와 합류하는 분기점에 서 있다. 에도 시대에 위험할 수 있는 밤길을 밝혀주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투박하지만 어딘지 정겹게 보이는 이 석등을 보면서 이 마을에 살았던 조선인의 솜씨가 아니었을까 짐작을 해보았다. 돌아오면서도 몇 번을 되돌아봤다. 고려교는 노면전차 스와진자(諏訪神社) 정류장에서 가깝다.
---「고려교와 조선인 기리시탄 마을」중에서
나는 2019년 4월 구로사키 지구 가쿠레 기리시탄 대표 무라카미 시게노리(村上 茂則) 씨를 만날 수 있었다. 무라카미 씨는 25세대, 52명의 신자를 이끄는 조카타(帳方)였다. 그가 건네준 명함에는 ‘구로사키 지구 가쿠레 기리시탄 대표 조카타’라는 직책이 명기돼 있었다. 가쿠레 기리시탄 조직 대표의 명함 한 장이 달라진 시대상을 여실히 보여줬다. 지금의 가쿠레 기리시탄은 숨어서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아닌 것이다.
---「지금도 건재한 구로사키(黑崎) 가쿠레 기리시탄 」중에서
시마바라·아마쿠사의 농민봉기 소식은 조선에도 신속하게 알려졌다.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하나인 인조실록 1638년 3월 13일 기사에 놀랍게도 당시 동래부사 정양필(鄭良弼, 1593~1661)이 올린 치계 내용이 실려 있다. 1638년이면 조선은 병자호란(1636년)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시마바라·아마쿠사의 농민봉기는 1638년 2월 28일 막을 내렸다. 이 소식이 불과 보름 만에 조선의 조정에까지 전해진 것이다.
실록에는
東萊府使鄭良弼馳啓曰 “日本關白家康時, 有南蠻人稱以吉利施端, 來在日本, 只事祝天, 廢絶人事, 惡生喜死, 惑世誣民, 家康捕斬無遺。 至是島原地小村, 有數三人, 復傳其術, 出入閭巷, ?誘村民, 遂作亂殺肥後守。 江戶執政等?滅之云。”
동래 부사 정양필(鄭良弼)이 치계하여 이르기를 “이에야스(家康)가 일본의 관백이었을 때, 길리시단(吉利施端)이라고 하는 남만인(南蠻人)들이 일본에 와 살면서 단지 하느님에게 기도하는 것만 일삼고 인사(人事)는 폐하였으며, 사는 것을 싫어하고 죽는 것을 기뻐하며 혹세무민하였는데, 이에야스가 잡아다 남김없이 죽여 버렸습니다. 이때에 이르러 시마바라(島原) 지방의 조그만 동네에 두서너 사람이 다시 그 술수를 전파하느라 마을을 출입하면서 촌사람들을 속이고 유혹하더니, 드디어 난을 일으켜 비후수(肥後守)를 죽였습니다. 이에 에도(江戶)의 집정(執政) 등이 모두 죽였다고 합니다.”
라고 기록돼 있다.
---「시마바라·아마쿠사의 농민봉기와 하라성터」중에서
이 마을 사람들의 성씨도 거의 ‘五輪’이다. 그런데 종가만 음독으로 ‘고린’이라 발음하고 나머지 집은 훈독으로 ‘이쓰와’라고 발음하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에도 많이 알려진 일본의 인기가요 ‘고이비토요(戀人よ)’를 발표했던 가수 이쓰와 마유미(五輪 眞弓)의 아버지가 이 마을 출신이다. 할아버지는 이 교회의 오르간 반주자였다고 한다. 이쓰와의 5대조도 로야노사코(牢屋の窄)사건 때 혹독한 고초를 겪은 것으로 전해진다.
---「혹독한 시령을 이겨낸 기리시탄의 섬, 히사카지마」중에서
사카이 씨가 이끌고 있는 가쿠레 기리시탄 조직에는 20여 가족이 소속돼 있다. 고토 열도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가쿠레 기리시탄 조직이다. 이들은 아직도 가쿠레 기리시탄의 특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이들이 스스로 가쿠레 기리시탄임을 밝힌 것도 불과 10여 년 전이었다. 그 전까지는 철저하게 외부에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다. 이들도 소토메에서 이주해온 잠복 기리시탄의 후손이었다. 이들 조직을 대대로 이끌어 온 조카타는 원래 사카이 씨의 처가인 후카우라(深浦) 씨였다. 사카이 씨의 장인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조카타 역을 사카이 씨가 물려받게 됐다.
---「와카마쓰시마(若松島)의 기리시탄 동굴과 마지막 가쿠레 기리시탄 지도자 사카이(坂井) 씨」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