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흘러 나는 책을 여러 권 냈고 곧잘 작가라고 불린다. 그동안 세상도 많이 변했다. 특히 여성과 약자, 소수자의 권리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 《당신과 나의 아이디어》 개정판을 내야겠다고 강하게 결심한 것은 최영미 시인이 고은 시인의 성추행을 폭로하고 나서였다. 고은 시인의 시를 인용했던 것을 당장 삭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단순히 그런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고은 시인이 문제라면 내가 예로 든 피카소는 문제가 없나? 간디는? 실타래는 보다 깊이, 오래 얽혀 있었고 어느 한 부분을 도려낸다고 말끔해지는 게 아니었다. 그동안 나의 생각과 인식도 많이 바뀌어 있었다. 대수술을 하기로 했다. 초판본에서 7장을 없애고 개정판의 11장을 완전히 새로 썼다. 이 책은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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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 가면 ‘천재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유의 책이 많습니다. 위대한 예술가, 발명가, 과학자, 기업가들의 창의성을 더듬어보는 책들이지요. 감탄을 자아내는 좋은 읽을거리입니다. 그런데 우리 대부분은 천재가 아닙니다. 평범한 사람이 창의력을 키우고 발휘하는 방법을 배우고자 할 때, 과연 이런 책들이 도움이 될까요? 우리와 마찬가지로 페달을 밟으며 나아갔다는 사실을 이야기할 겁니다. 또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는 당신이 직접 핸들을 잡고 발을 바닥에서 떼어 페달을 밟아보라고 말합니다. 자전거 타기와 마찬가지로, 각자의 현장에서 창의성과 아이디어를 발휘해보는 것은 무척이나 즐거운 일이며 인생에도 유익합니다. 하지만 결국 이 모든 건 “넘어지려는 방향으로 핸들을 꺾어!”라는 충고 정도가 되겠지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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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마치 봄이 오고 비가 내리면 씨앗이 톡, 하고 싹트는 것과도 비슷해요. 아무리 조건이 갖춰져도 흙 속에 씨앗이 있어야 싹이 트지 않겠어요? 사람들 속에는 씨앗이 유영하듯 떠돌고 있어요. 기억이 생생히 나는 씨앗도 있고 내 안에 들어와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씨앗도 있어요. 그런 말이 있죠. “무의식은 모든 것을 기억한다.” 우리의 거대한 무의식의 공간 안에도 온갖 씨앗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언젠가 그 씨앗들이 어떤 자극으로 인해 부딪치거나 서로 교류를 일으키면 아이디어의 싹을 틔워낼 수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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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성을 키우라면서 내놓는 조언들을 생각해보세요.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가져라” “발칙한 상상력으로 도전해라” “미래는 꿈꾸는 자의 것이다” “창의력으로 세상을 뒤집어라”…….틀린 말은 아닐지도 몰라요. 하지만 공허하죠. 손에 잡히지도, 눈에 보이지도 않아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겐 질문을 던져야 해요. “도대체 어떻게요?” 또는 “그러려면 뭘 해야 하죠?”라고. 그러면 대부분은 아무 대답도 못 할 거예요. 자기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모르기 때문입니다. 거창한 말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해요. 학교 담장에 ‘학원 폭력을 근절합시다!’라는 플래카드를 건다고 해서 폭력이 근절되는 게 아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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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디어는 완벽한 단어예요. 창의성, 크리에이티비티처럼 모호하기만 한 단어가 아닙니다. 창의성이란 말은 결과물 전체에 깃들어 있는, 연기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무언가 같지 않아요? 아이디어는 안 그래요. 거대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구조도 아이디어라고 부를 수 있지만, 동시에 아주 사소한 행동이나 생각도 아이디어라고 부를 수 있죠.
어깨를 툭 치며 “거 좋은 아이디어네”라고 말하는 건 자연스럽지만 “넌 참 창의적이야”라고 말하는 건 어딘지 유난스럽지 않나요? 게다가, 아이디어는 쉽게 주고받을 수 있어요. 누군가의 아이디어를 가져와서 내 작업에 쓸 수도 있고, 내 아이디어를 빌려줄 수도 있어요. 아이디어와 아이디어를 결합할 수도 있고, 쪼갤 수도 있지요. 창의성이란 단어는 그렇게 쓸수 없어요. 창의성은 그 사람이 가진 고유의 인성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쉽게 주고받거나 결합하고 쪼갤 수가 없습니다. 이건 중요한 차이예요. 아이디어란 말은 벽돌처럼 쓸 수 있어요. 아이디어들을 쌓아서 다리를 놓을 수도 있고, 집을 지을 수도 있죠. 하지만 하나하나의 아이디어 벽돌은 다리도 아니고 집도 아니에요. 그 벽돌로 완전히 다른 걸 만들 수도 있죠. 게다가 완성된 다리나 집 전체를 아이디어라고 부를 수도 있어요. 정말 쓰임새가 많고 유리한 단어입니다. 앞으로는 창의성 대신 아이디어라는 단어를 많이 써보세요. 단지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태도는 많이 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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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디어는 너무나 큰 말이기도 해요. 모든 관념, 이념, 개념, 사상, 학문, 체제 등은 기본적으로 아이디어입니다.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지요. 우리가 당연하게 있어온 것처럼 받아들이는 수많은 것이 역사의 어느 시점에 태어난 아이디어란걸 생각하면 참 놀랍습니다. 이를테면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건 아이디어이죠. ‘인권’이라는 아이디어는 인간의 역사에서 정말이지 최근에 나타난 개념이라고요. 그 전엔 ‘노예’라는 아이디어가 있었죠. 노예로 태어난 인간은 그때도 없었고 지금도 없어요. 아이디어가 있었을 뿐. ‘인종주의’나 ‘남녀평등’도 다 하나의 아이디어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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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디어의 렌즈를 통해 살펴본다면 과거의 펄떡이던 아이디어들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죠. ‘재발견’이란 얼마나 가슴 뛰는 말입니까. 남들이 떠받드는 것의 옆에, 그 벽 아래 그늘진 곳에 놓여 있던 무언가를 집어 들어 먼지를 떨어내고 반짝임을 발견하는 것. 모든 것이 사라지지 않고, 나를 통해 살아나는 겁니다. 불의에 항거해 죽은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내가 발견하고 잊지 않는다면 그 아이디어는 점화되어 내 안에 살아 있게 돼요.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어요. 과거와 현재는 별개의 것이 아니에요. 작고 크게 일어나는 ‘아!’ 하는 느낌. 이제 당신이 스스로 아이디어를 찾아봐야 해요. 점점 어둠에 눈이 익듯이, 당신 주위에 있는 무수한 반짝임들이 조금씩 눈에 들어올 거예요. 그건 사물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행동이거나 음악의 한 부분일 수도 있어요. 반짝이는 아이디어의 씨앗이 당신 안에 들어올 때마다 당신의 아이디어는 그만큼 유연해지죠.
--- p.197
아이디어의 숲을 풍요롭게 하는 건 “거꾸로 생각하라” “모든 걸 새로운 시각으로 보라” 같은 깔끔한 한 줄짜리 명제들이 아니에요. 그런 건 오히려 방해가 됩니다. 방법은 오직 크고 작은 아이디어의 예들을 발견하는 것뿐이에요. 예는 죽은 명제와 달리, 피와 살을 가진 구체적 실재예요. 살아 있는 거죠.
--- p.205
함수 상자를 믿으세요. 당신이 무언가를 많이 느끼고 감탄하며 아이디어 숲을 잘 살려두었다면, 당신이 집중할 때 함수 상자는 분명 무언가를 꺼내어줍니다. 무언가 불편하거나 미진하거나 지루할 때, 그 상태를 받아들이기보단 이 함수 상자를 떠올려보세요. 아주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하는 방법이 떠오를 거예요. “우리, 한강 가서 캔 맥주 마실까?” 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회사 생활에서 불합리하거나 힘든 부분이 있을 때,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지 말고 그걸 조금이라도 낫게 할 다른 방법이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세요. 이 함수 상자에 넣을 게 무엇이고 도출되기를 바라는 나아진 상황이 무엇인지 곰곰 진단해보고 실험해보세요.
--- p.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