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아름다운 서사시와 같은 작가의 ‘시·서·화(詩·書·畵)’ -“가난한 그대, 평화가 되라”에 대한 소회
작가 남금란은 가정폭력피해여성보호시설의 책임자로서 오랜 기간생활현장의 경력을 지니고 있다. 그녀의 시선은 남다르고 예리하며주의 깊다. 인간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도 그러하거니와 사물과 자연 세계를 대하는 관찰력도 탁월하다. 기성 작가들에 비해 시인으로서의 기법은 다소 떨어질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 순수함은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도 남는다. 인생에도 사계절이 있듯이, 그의 시는 연중 계속 현재 진행형이다. 수년간에 걸쳐서 공들인 흔적이 여기저기 피어나는 동산의 꽃들과 같다. 자연과 자신의 성찰 그리고 일
을 통해 배워 가는 모든 과정에서 시인은 깊은 영감을 얻는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들을 우리는 시인의 독특한 풍미의 글씨 서체와 그림 속에서 다양한 맛을 볼 수 있다. 가히 시·서·화(詩·書·畵)의 잔치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의 주옥같은 여러 편의 작품 가운데, 〈접시 꽃〉 한편 만을 보아도, 시인이 경험했던, 환경이 꽃 속에서도 잘 녹아 있음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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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게 뻗은 가지에 부드러운 붉은 꽃잎홀로 섰을 때에만 날개 펴듯 자유로워기억의 그림자 스스로 떨치고 노래되어서비바람 맞아도 스러지지 않는 ‘나다움의 나’를 피웠습니다.” 위의 시에서 알 수 있듯이, 시인은 〈접시 꽃〉의 수수함 속에서, “홀로 섰을 때에만 날개 펴듯 자유로움”을 본다. 시설에 찾아오는 여성들의 삶이 늘 그러하듯이 자유롭지 못한 환경에서 억눌려 살아 왔지만. 이제는 그러한 슬픈 “기억의 그림자 스스로 떨치고서, 비바람 맞아도 스러지지 않는” 진정한 자기다움을 꽃 피우는 사례들을 보면서, ‘접시 꽃’에 투사된 고단하지만 그것을 극복한 ‘홀로서기’의 자유를 통찰하고 있는 셈이다. 인간은 누구나 ‘나다움의 나’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난의 세월을 겪어야 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인간은 끝내 ‘홀로서야 할 존재’ 이면서도 홀로 살기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러한 자유와 환희를 겪기까지는 서로서로의 돌봄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시인은 또 다른 한 편의 시, 〈넝쿨 장미〉에서 더불어 살아가며 위기와 고난을 극복하는 ‘우리’를 주목하게 한다. 그 전문을 감상해 보자.
“붉은 기도 알알이 엮고 엮어 등불을 켜나 보다. 서로를 견뎌주는 온기에 겨워 내가 꽃이 되었나 보다. 저 혼자 스러지지 않도록 넝쿨의 숨은 뜻이 향기로 터지나 보다. 태양의 얼굴 앞에서 땅의 품안에 어우러진 넝쿨장미 같은 우리. 환히 웃는 기쁨, 바람에 번지며 창살 담장너머로 흐드러지는 넝쿨장미의 오월.”가난한 그대, 평화가 되라 l 21시인의 간절한 기도가 장미의 “붉은 기도”로 이입(移入)되고, 그 기도의 결실이 ‘등불’로 승화(昇華)된다. 그러나 그러한 화려한 계절은 겨울이라는 혹독한 추위와 고난의 계절을 견뎌야 했다. 그점에 대해 시인은 “서로를 견뎌 주는 온기”로, 끝내 한 송이의 “꽃” 을 피워내는 과정으로 묘사하고 있는 듯하다. 이제 꽃으로 피어난 장미의 환한 웃음은 “태양의 얼굴과 땅의 품”이 합력하여 이루어낸 성과이듯이, 인생도 “넝쿨을 이룬 장미”처럼 어우러져서 살아야 하는 “우리”임을 넌지시 말하고 있다. 이제 그러한 오월의 기쁨은 창살과 같은 우리의 ‘고난의 일상’을 너머 서는 일이다. 한편, 본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가난한 그대, 평화가 되라〉라는 시의 일부를 보면, 작가가 얼마나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 대한 애정이 깊은지를 잘 알게 될 것이다. 그 일부를 감상해 보자.
“... 위태로운 세파 속 두려움 내던지고 여윈 몸과 빈 주머니 가벼워진 생각으로 그대, 평화가 되라... 소소한 일상으로 함께 웃으며 홀로 울고 있지 않기를, 만나면 꽃이 되고 멀어지면 별이 되는 그대, 평화가 되라.” 이 밖에도 전편에 흐르는 시들을 보면, 꽃과 숲, 그리고 낙엽과 눈으로 상징되는 다양한 소재와 장치 속에서 시인은 인생의 남다른 깊은 통찰들을 곳곳에서 엿보게 한다. 126편의 아름다운 시들을 일일이 소개하고 싶지만, 지면 관계상 다시 한편의 시만 더 감상함으로써, 추천의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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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무는 가을 길에서〉
“여기, 바람에 실려 내리는 당신의 손이 있습니다. 잎 새 같은 매순간 당신도 함께 걸으셨습니다. 나무에 달려 있을 때나, 땅에 누워 있을 때그리 다르지 않은 고운 모습삶과 죽음이 또한 이 같지 않겠습니까? 잠깐이기에 못내 아쉬운 가을 같은 생(生)그래서 더욱 애틋하게 보듬습니다. 속으로 불타는 가슴, 몰래 삭이는 기도를 품었기에 다가올 겨울 이미 따뜻합니다.” 시인은 낙엽을 “당신의 손”이라고 표현한다. “당신”은 신(神)이 될 수도 있고, 상상하기에 따라 그 누구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잎 새 같은 매 순간”이라는 표현 또한 찰나적 변화의 시간을 한 잎 한 잎의 공간 속에 배치하는 탁월한 발상이다. 삶과 죽음이 바로 이 ‘한 잎 한 잎의 잎 새’의 시공 속에 전개되기도 한다. 그러한 생로 병사의 매 순간에도 ‘신(神)’은 함께 걷고 있다. “나무에 달려 있을 때나, 땅에 누워 있을 때”에도, ‘신(神)’의 손길은 떠나지 않기에, 혹독한 겨울이 곧 다가올지라도 ‘기도’ 속에 품은 ‘신(神)의 온기’는 거뜬히 ‘저무는 가을’을 건너고 겨울을 맞이할 차비를 하고 있다. 그래서 삶도 아름답고 “죽음 또한 그와 같으리라”는 고백을 하는 듯하다. 한편의 아름다운 서사시와 같은 작가의 ‘시·서·화(詩·書· 畵)’를 읽고 보면서 독자에게도 일독을 적극 권한다.
---「추천인 이명권(동양철학자)의 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