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도 하나의 유기체라면 몸과 정신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도시의 경제, 공간 등 하부구조가 몸이라면 지역민의 기질, 공동의 사고방식 등이 정신일 것이다. 도시의 몸에 대한 얘기는 가시적이고 계량화가 가능해서 연구가 축적되었다. 그러나 도시의 정신에 대한 얘기는 비가시적이고 계량화가 불가능해서 담론만 쌓이고 구체적인 연구가 일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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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사람들은 누구인가? 부산정신은 무엇인가? 부산사람 기질의 사회적 특성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어떤 지역 사람들의 행태나 그 도시의 문화적 특질 혹은 고유한 정책의 기원을 평가할 때 항상 지역정신 혹은 지역기질과 결부하여 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를 들어 ‘부산에서 운전하기 힘든 것은 부산사람들이 바닷가 특유의 거친 기질에다가 급한 성격으로 인한 운전습관 때문’이라고 한다. 혹은 ‘광주 출신 유명 예술인이 많은 것은 전라도 특유의 전통적인 예향 기질 때문’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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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명이 옹기종기 모여 살던 부산포에서 340만 메트로폴리탄으로 확대 성장한 부산이라는 도시의 진정한 역사, 현재, 미래적 정체성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시의 물리적 성장과 팽창뿐만 아니라 ‘도시의 영혼’soul of city을 진중하게 이해해야 한다. ... 도시의 영혼에 대한 이해는 그동안 장소, 역사, 개인에 대한 분절적 이해를 넘어서 도시와 개인의 발전에대한 상호관계성의 새로운 틀을 제공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부산정신과 기질에 관한 접근은 부산의 영혼에 대한 관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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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오늘날 부산인들의 정신과 기질적 특성을 일견 보면 이러한 빛나는 상업도시의 전통을 잇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 상인적 기질을 ‘전통적 양반정신의 훼절’로 폄하하는 이중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동래’와 ‘부산’의 역사적 긴장관계 속에서 역사적으로 ‘길항 컨텍스트’가 형성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상업도시 부산의 정신과 부산사람의 기질을 이해하기 위해 왜관과 동래상인과 통신사라는 세 가지 열쇳말을 중심으로 풀어가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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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만 포구 시절부터 대규모 상업항으로 발전하는 수백 년의 역사 속에서 부산사람들에게 헤어짐과 만남은 곧 일상이었다. 부산의 원지(原地)인 동래는 수많은 유배객들의 한숨이 서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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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출발은 거칠산국(居漆山國)과 장산국(?山國)에서 시작된다. 5세기경까지만 해도 부산은 역사적으로 가야와 신라의 변경지역에서 나름대로 독자적인 고대국가의 문화를 꽃피워 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부산지역은 신라 해상진출의 통로였다. 뿐만 아니라 김해의 금관가야를 포함한 넓은 지역이 철기문화의 중심지로서 일본과의 활발한 교류 활동의 거점이었다. 즉, 신라와 가야의 변경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당시로써는 첨단적인 철기 생산과 해외수출입을 주도한 ‘고대의 실리콘밸리’ 지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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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사람들은 의리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성리학적 의리철학에서 출발하면서도 그 내적 논리에 머물지 않고 상업도시 특유의 생활 속 의리정신으로 변형하고 체화하여 왔다. 이는 어제오늘 형성된 것이 아니라, 부산의 지리, 인문, 역사적 흐름 속에서 다듬어지고 각인되어 부산이라는 공동체 속에 하나의 가치체계로 정착되었다. 특히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조선시대 이후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으로 상징되는 영남 사림의 의리 전통이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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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래로 바다를 끼고 상업이 발달되었던 도시들의 지역적 기질과 지역민의 특성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으나 신의, 계약, 믿음에 대한 강조를 하고 있는 공통점은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중세와 근대 초기에 전 세계 상권을 장악하였던 5대 세계 상권과 그 핵심 도시들에서 이러한 특징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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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고향을 떠난 자들의 지킬 것 없는 이향성, 끊임없이 왕래가 이루어지는 상업성, 변방지역의 불이익이 집산화된 변경성, 바다로부터 외부침략의 최선단 피해지인 해방성海防性, 항구도시의 유동성이 부산을 참을 수 없는 저항과 반역의 도시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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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부산정신의 핵심을 의리성과 저항성이라는 두 가지 특성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지역정신은 사회적, 역사적 상황에 반응하는 것이다. 지역정신이 내적 가치체계라면 지역기질은 외적 표출양태다. 순수심리학에서는 기질과 특질로 나누어 보기도 하지만 사회학에서는 지역정신, 지역적 기질과 문화적 특성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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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정체성과 부산인의 지역기질에 관한 풍부한 논의가 펼쳐질 이른바 ‘부산학의 황금시대(Golden Age Of Busan Studies)’가 와야 한다. 그 시기가 와야 지역정신과 지역기질의 장단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또 그러한 논의가 공론의 장에서 숙성될 것이다. 지역정신의 긍정적 측면은 지역민의 자부심으로 승화되고, 지역기질의 부정적인 측면은 스스로 정화할 때라야만 지역정신과 기질은 중요한 사회자산으로 축적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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