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부의 방 앞 댓돌에는 그의 군화 한 켤레가 오두마니 놓여 있고, 창호지를 통해 흐릿한 불빛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상장군님, 산원 이고와 이의방입니다!” 두 사람은 기척을 내고 방으로 들어갔다. 썰렁한 냉기가 감도는 방 안에는 조그마한 촛불 하나가 호젓하게 켜져 있을 뿐, 아무 것도 없었다. 조촐한 다담상이나 간단한 주안상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응양군을 통솔하고 임금의 호종을 총괄하는 상장군의 거처가 수직을 서는 위졸들의 거처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허어! 상장군님, 대체 이게 뭡니까?” 이의방이 방 안을 둘러보며 대뜸 목소리를 높였다. “무얼 그러나?” “상장군님, 정말 몰라서 이러십니까? 제놈들은 배가 터지게 처먹고, 소화를 시키지 못해 토악질을 하고 나서 또 처먹고 또 처먹고 하면서, 상장군님에 대한 대접이 이렇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정말 개만도 못한 종자들입니다!” 이고가 분통을 터뜨렸다. “목소리 높이지 말게. 나는 괜찮네.”
-그날도 그는 무비의 거처에서 밤을 새우고 새벽에 밖으로 나오다가 마침 정중부의 위졸들이 쳐들어와서 닥치는 대로 베고 찌르는 것을 보고서, 크게 놀라 다시 무비의 거처로 달려갔다. “큰일났소! 반적들이 쳐들어와서 사람을 마구 죽이고 있소! 빨리 도망치지 않으면 죽임을 당할 게요!” 그와 무비는 후원의 뒷담을 뛰어넘어, 소란을 틈타 대궐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청교역의 한 민가에 몸을 숨겼다. 무비가 대궐을 나올 때 급하게 챙겨 가지고 나온 값진 패물 중 두어 개를 내놓고서 며칠간 몸을 숨겨 주길 청했던 것이다. 정중부는 김돈중과 무비, 정함, 백선연 등 도망친 의종의 폐신(嬖臣들을 붙잡기 위해 도성에서 빠져 나가는 길목마다 휘하의 위사들을풀어 놓았다. 마을마다 그들을 붙잡아 오거나 숨어 있는 곳을 신고한 사람에겐 큰 상금과 벼슬을 내린다는 방도 붙였다.
이의방의 휘하에 있는 대정(隊正) 조원정이 몇 명의 위졸들과 청교역을 지키고 있는데, 마을 사람 한 명이 다가와서 말했다. “우리 집 골방에 중년 남녀 한 쌍이 숨어 있소! 둘 다 얼굴이 놀랍게 희고 잘생긴 게 우리같이 미천한 백성은 아닌 듯싶소.” 조원정은 그의 집으로 달려가, 집주인이 가리키는 골방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젊은 남녀가 이불을 덮고 함께 누워 있다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 모두 옷매무새가 흐트러지고 옷고름이 풀려 있는 게 서로 희롱을 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조원정은 그들이 백선연과 무비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윤관의 의견을 받아들인 숙종은 대대적으로 별무반을 편성케 하였는데, 별무반은 기병부대인 신기군(神騎軍), 보병부대인 신보군(神步軍), 승려부대인 항마군(降魔軍), 돌격부대인 조탕군(?蕩軍), 활 쏘는 갱궁군(梗弓軍), 쇠노 쏘는 정노군(精弩軍), 화공부대인 발화군(發火軍) 등으로 조직되었다. 모든 부대는 그 부대의 특성에 맞는 군사 훈련을 강화하고, 군량과 무기를 비축하여, 앞으로 있을 전쟁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여진과의 전쟁 준비에 힘을 쏟던 숙종이 갑자기 승하하자 고려는 출병을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선왕 숙종의 여진 정벌에 대한 서소(誓疏)를 간직하고 즉위한 새임금 예종(睿宗)은 복(服)을 벗자마자 윤관을 도원수로, 지추밀원사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로 삼아 여진 출병을 명하니, 윤관이 임금께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선왕의 밀지(密旨)를 받았고, 이제 또 폐하의 엄명을 받았사오니, 3군을 통솔하여 적의 보루를 격파하고, 우리 강토를 개척하여 반드시 지난 날의 국치(國恥)를 씻겠사옵니다.” 하고, 결의를 다졌다.
-망이와 정첨은 크게 놀랐다. 정중부는 바로 응양군 최고 사령관이고, 그들의 상관 아닌가. 기어이 터지고 말았구나! 두 사람은 진작부터 응양군 내에 비밀조직이 있고, 그 비밀조직이 위로는 상장군부터 아래로는 대정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숫자의 무장들이 가입해 있다는 걸 짐작했었다. 망이와 정첨도 중랑장 진준과 산원 김홍강을 통해 그 조직의 일원이 되었으나, 구체적인 조직의 상층부는 모르고 있었다. 조직의 안전을 위해 점조직(點組織)으로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에 상세한 것은 알 도리가 없었다. “두 분은 그간 무슨 낌새를 못 챘소?” 이광이 망이와 정첨에게 물었다.
“사실 그간 응양군 내에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다는 건 알았소. 그러나 그들이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은 몰랐소.” 망이가 산원 김홍강과 중랑장 진준이 그들에게 접근해 왔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럼 두 사람도 빨리 개경으로 돌아가 봐야 하는 것 아니오?” 이광이 망이와 정첨을 보며 말했다. 그러자 계암 스님이 말했다. “…지금 돌아가면 두 사람 다 무자비한 피바람에 휘말려 살상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오. 그보다는 차라리 이곳에 좀 더 있다가 피바람이 잦아지면 가는 게 어떻겠소이까?” “저도 스님의 말씀을 따르고 싶군요. 망이 장사의 생각은 어떠하오?” 정첨이 말했다. “스님 말씀을 듣고 보니, 그게 좋겠습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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