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복음주의가 풍부한 성경 유산에 대해 진실되게 남아 있으려면, 복음주의적 성경신학의 목적을 성경 자체의 의미에 다시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성경 말씀은 그 말씀이 지시하는 실체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성경이 실제적인 것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내 주장은 오히려 그 반대다. 나는 성경의 신학적 의미가 문장들의 일부로서의 단어들, 단락들, 전체 텍스트의 의미에 놓여 있다고 주장한다. 성경의 단어들은 성경 언어의 일부이며 그 언어의 컨텍스트 안에서 의미를 가진다. 성경 단어들의 의미는 성경을 쓴 자들과 저자들의 의도의 표현 속에 놓여 있다. 저자들은 단어의 의미에 대해 독특한 이해를 가지고 사용했으며, 그것을 읽는 우리가 그 단어가 의미하는 바를 알기를 기대한다. 따라서 성경이 지시하는 실체의 의미는, 성경에서 발견된 단어들의 의미로부터, 그리고 단어가 가리키는 실체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으로부터 얻어야 한다. (2장, 120
저자는 모세 오경의 형태와 전략뿐 아니라 그 전략에서 드러나는 신학도 이해하고 있었다. 이 수많은 해설들은, 정경적 오경이 편집이나 문서 확장의 점진적인 과정의 결과가 아님을 보여준다. 오히려 이 해설들은 현재의 형태 전체 뒤에 있는 지능적인 설계의 증거이며, 짧은 기간 동안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들은 층위(strata)보다는 전략(strategy)을 반영한다. 이 해설들은 원래의 모세 오경의 의도적이고 공감적인 갱신이다. 이것들은 타나크로서의 성경에 맞도록 갱신됨으로써 원래 오경을 보존했다는 의미에서 리메이크였다.---p.274-275
구약에서 시작되어 구약을 통해 신약으로 이어지는 “점진적 계시”의 개념도 이 문제를 경감시키지 못한다. 문제는 영어로 된 문구인 “약속과 성취”의 개념에 있으며, 이 개념이 구약과 신약의 성경신학을 평가하는 격자 틀로서 사용된다는 데 있다. 이 격자 틀은 구약과 신약 사이의 내재적 관계를 보는 중립적 견해가 아니며, 기독교 정경 전체의 내재적 가치에 대해 사전에 결정된 평가다. 따라서 이 격자 틀을 두고 무슨 이야기를 하든지, “성취”로서의 신약은 그것과 상응하는 “성취되지 않은” 것으로서의 구약에 대한 평가절하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약속과 성취”를 “미성취와 성취” 외에 다른 것으로 보기는 힘든 것이다. “성취”라는 신약적 사고의 측면에서 구약에 “약속”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어쩔 수 없이 구약 메시지에 대한 평가절하, 그리고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구약 메시지가 가지는 중요성에 대한 평가절하를 가져온다. 물론 문제에 대한 인식이 해결과 같은 것은 아니다. 신약 저자들 스스로도 그들의 새로운 상황과 구약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는 방법으로 “약속”의 개념을 사용했다는 추가적인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신학에서 “약속”이 가지는 궁극적 가치에 대해 질문하도록 만든다. 신약 저자들처럼 우리도, 현재의 기독교적 삶 속에서 구약을 평가절하함이 없이 여전히 구약을 “약속”으로 말할 수 있을까?---pp.558-559
오경의 저자는 미래를 보면서 희망을 묘사하고 있지 않다. 오경은 오실 분에 대한 예언이 아니다. 오경은 일차적으로 예표론적인 이미지에 집중하지 않는다. 오경의 이미지들은 예수를 향해 있지 않으며, 신약에서야 예수로 확인될, 오실 왕을 향하고 있다. 오경의 저자는 그의 조상들(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이해하고 신뢰했다. 이런 언약의 관점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신실함에 근거해서 저자는 고대 이스라엘을 위한 새로운 미래의 전체 그림을 보여준다. 오경은 미래로부터 온 빛이 과거로 되쏘여지는 그런 책이 아니다. 또한 오경의 의미는 신약을 오경의 언어적 이미지에 비추어 읽는 독해에 의존하지도 않는다. 오경은 미래로부터 온 빛이 아니다. 오경은 과거로부터 온 빛으로서, 이 빛은 독자들에게 미래를 보는 방법을 알려준다. 오경의 빛은 미래가 도달한 때와 마찬가지로 빛나고 있으며, 오경의 의미는 이미 그 빛 속에 포함되어 있다. 오경은 미래로부터 온 탐조등이 아니라, 과거를 보여주는 슬라이드 쇼다.---p.737
예수는 오경에 표현된 소망의 관점에서 자신의 삶을 이해하고 자신을 인식하셨다. 예수가 오셨을 때, 구약을 이해했던 자들은 그분을 “오실 분”으로 인식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분이 떠나셨을 때는?그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 후?누가 그분을 “오시기로 했던 분”으로 볼 수 없었겠는가? 다니엘 7장의 “인자”, 다니엘 9장의 “끊어진” 메시아, 창세기의 뱀에 의해 발꿈치가 상한 구속자(창 3:15), 복음서에서 예수는 그분의 인격과 삶 안에 승인이 되는 이 모든 이적과 이미지들을 가지고 계셨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은 오로지 그분의 부활 이후에 완전히 드러났다(롬 16:25-26). 하지만 이 빛이 왔을 때, 이런 신호와 이미지들이 구약적 배경에서 확인되었을 때, 이것들이 이미 예언자들의 말 속에 늘 있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예수는 구약 없이는 인식될 수 없었다. 갈릴리의 제자들처럼, “그에 관해 모세가 율법에 그리고 또한 선지자들이 기록한 분”으로서 예수를 보았을 때만 그분을 알 수 있었다. “그가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을 때만, 그들은 예수를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분이 구약에서 알려지지 않았거나 인식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는 오랫동안 숨겨졌으며 이제 예언서에서 밝혀질 수 있음”을 의미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를 처음 보았던 사람들이 구약과 비교할 수 있는 신약 버전의 예수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구약과 비교하여 그들이 알았던 예수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비교는 나중에 구약을 배경으로 하여 신약으로서 텍스트적으로 간직되었다. 이것은 신약이 아니라 구약의 의미를 많이 상고한 끝에 나온 최종 결과였다. 예수가 마태복음 13:52에서 말씀하셨듯이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예수를 성경에서 보는 것은 그분을 옛 용어와 새 용어로 이해하는 기능이었다. 이런 “집주인”에 대한 가장 명확한 예는, 구약성경으로부터 “오실 분”을 알았지만 그것에 근거해서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던 사도 바울이었다.
---pp.737-7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