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어린아이가 첨벙거리고 코끼리가 헤엄칠 수 있는 바다와 같다고들 합니다. 성경의 모든 부분들이 그렇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요한복음에 대하여는 참으로 그러합니다. 어떤 면에서 요한복음은 무척 쉽습니다. 빵, 물, 빛과 어두움, 목자와 양, 포도와 포도주 같은 요한복음의 주요 상징들은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요한복음은 기억하기 좋고 간결한 말씀들로 가득한데, 각 말씀 속에는 메시지가 캡슐처럼 저장되어 있습니다(“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 이런 특성들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독자라도 요한복음을 읽기만 하면 유익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읽고 신앙을 갖게 되는 이들이 많은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요한복음은 평생토록 연구해도 새롭게 얻을 것이 있는 책입니다. 예컨대 예수와 구원에 관한 요한복음의 위대한 상징들은 각각의 배경이 되는 구약성경을 이해해야 그 의미가 더욱 풍부해집니다. 또한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부분들은 요한복음에 익숙한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요한복음은 골똘히 생각하고 고민하게 만듭니다. 요한복음은 독자들에게 수수께끼를 내고 풀어보라면서 독자들의 마음을 자극합니다. 본문의 표면 아래를 탐사하도록 초대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이야기들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우리가 그 이야기 속에 들어가 더욱 심오한 것들을 경험하도록 합니다. 이러저러한 이유들로 요한복음을 자꾸자꾸 들여다보게 하지만, 그 의미는 고갈되지 않습니다. 이 책은 요한복음을 처음 읽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책은 요한복음에 익숙하지만 더 파고들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모쪼록 이 책이 갈급한 사람들에게 요한복음이 주는 영적 풍성함을 선보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한국어판 서문」중에서
요한복음은 개인과 예수에게 초점을 맞추어 전혀 다른 차원의 “개인주의”를 선보인다. 신자 개인과 예수 사이의 사사롭고 친밀한 관계에 가치를 두는 것이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바로 예수의 사랑받는 제자와 예수 사이의 독특한 친밀감인데(13:23; 21:20), 어쩌면 이 친밀감은 예수가 지상에 있을 때 실제로 그 제자와 맺은 우정을 반영하고 있을지 모르며, 그 우정이 요한복음 영성의 토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와 유사한 친밀감은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감동적인 해후 장면에서도 드러나는데, 거기서 예수는 평소처럼 다정하게 그녀를 불러서 그녀가 자신을 알아보도록 하고(20:16), 이제 둘 사이의 친밀함은 다른 양상으로만 지속될 수 있음을 일깨운다(20:17). 또한요한복음은 예수와 제자들 그리고 예수와 아버지 사이의 특별한 친밀감을 “하나 안에 또 하나”라는 언어로 표현한다. 이에 관하여는 다음 장에서 살펴보겠다. 이 언어가 제자들끼리의 관계를 나타내거나, 부활하여 영화롭게 된 예수와 개인 사이의 관계를 나타낼 때 사용된다는 것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이 언어는 지상의 예수와 어떤 사람의 관계를 나타낼 때도 사용되지만, 제자들 사이의 관계를 나타낼 때도 사용된다. 후자는 인간이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서는 특별한 친밀감을 나타낸다. 이런 관계를 “신비주의”라는 말로 조심스럽게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개인주의」중에서
이 장에서 나는 요한복음이 채택한 네 개의 커다란 신학적 용어들, 즉 “사랑”, “생명”, “영광”, 그리고 “진리” 등을 순서대로 다루면서 이 단원의 주제에 참신하게 접근해보려 한다. 여기서 “커다란” 용어들이라고 표현한 까닭은 그 용어들이 창출하는 의미가 너무 풍부하여 어떤 특정 해석의 틀에 가둘 수 없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 용어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들여다보는 창들처럼 명상할 장면들을 열어준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주제를 완벽하게 모두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설명하지는 않으나, 그 용어들은 요한복음에 퍼져 있는 폭넓은 관련 자료들을 아우르며 접근할 수 있도록 돕는다. 내가 예수의 “죽음-부활/승귀”라고 표현하는 까닭은, 다른 초기 그리스도교 저자들처럼 요한은 죽음-부활-승귀의 순서로 세 주제를 한꺼번에 나열하는 법이 없고, 죽음-부활 내지는 죽음-승귀 식으로 둘씩 둘씩만 다루기 때문이다. 이런 이중구조의 두 번째 단어는 언제나 변주된다. 부활은 예수가 다시 생명을 얻고, 다시 그 제자들에게 “돌아오는 것”이고, 승귀는 예수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십자가, 부활, 승귀」중에서
이 책의 다른 장들과 달리 이 장에서는 특정한 신학적 주제에 집중하는 대신 요한복음의 한 부분(서문 다음으로 처음 등장하는 주요 부분)을 탐구할 텐데, 이 부분은 요한복음의 주요 주제들 중 몇 가지를 소개하는 부분이다. 이 장에서는 그 부분을 완전하게 주석하기보다는 어떻게 복잡한 의미가 다양한 방식으로 생성되는가를 보여주려 한다. 이렇게 하는 유일한 목적은 문자적 의미가 다른 의미의 차원들 때문에 조작되거나 전복당하지 않은 채 그 자체의 고유한 의미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다(여기서 문자적 의미란, 전개되는 하나의 사화에 포함되는 여러 사건들이 시간 순으로 이야기되는 차원의 의미를 뜻한다). 요한복음을 해석할 때 문자적 의미들이 종종 간과되곤 한다. 그런데 의미가 문자적 차원을 넘어 다양한 방식들로 생성되는 것을 인정하는 것도 중요하다. 요한복음의 상징 탐구에만 과도한 열정과 상상력을 쏟아 부으면, 정작 요한복음 텍스트의 정교하게 짜인 구조라든가 섬세하고도 은밀하게 암시되어 있기 마련인 더 깊은 의미에 주의를 기울이는 일을 소홀히 하기 마련이다. 히브리어 성경의 관련 본문들을 자세히 살펴 대조하면서(요한복음이 오로지 70인역만 사용했다는 부당한 추측 때문에 종종 히브리어 성경과 대조할 필요가 무시되곤 한다) 유대의 주석 기법들을 이해할 필요도 있다.
---「요한복음의 첫째 주간의 다차원적 의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