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다시피 나는 미래에 대해 알고 있어요. 대략 앞으로 30년 정도까지는요. 다른 말로 하자면 30년 정도를 미리 살아버렸다는 뜻인데, 그러니까 서른아홉 살의 논리로 보았을 때 나는 전혀 특별한 게 아니거든요. 엄마는 올해 고작 서른다섯이에요.”
스물일곱 살의 선생님은 다시 전화할 것이다.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고 걱정하며 전문적인 치료를 권할 가능성이 높았다.
“죄송해요, 선생님. 하지만 이건 망상이나 허언증과는 달라요. 우리 아이는 공감 능력이 뛰어날 뿐이에요. 병이라기보단 그냥 상상력의 문제라고요. 제 아빠를 너무 일찍 잃은 대신 얻은, 일종의 대체재 같은 거요.”
예상할 수 있는 엄마의 답변.
---「가능한 세계」중에서
떠나던 날, 유복했던 그 여학생만이 나를 배웅해주었다. 모두가 애써 모르는 척하는데도 복도에서 마주치자 허리를 숙였단다. 안녕히 가시라고, 고생하셨다고. 고마웠지. 악수를 하고 싶었다. 그 애가 그러더구나.
“손 치워, 이 개새끼야.”
떨리는 목소리로. 끝까지 예의가 바른 학생이었지.
“아, 죄송해요. 부모님께서 위급할 때 그러라고…… 그래도 된다고, 그런데 제발 손 좀 치워주세요.”
---「고두叩頭」중에서
선생님, 나는 오래전부터 당신이 되고 싶었습니다. 아무에게도 들킨 적 없는 내 아버지의 내면을 알아본 당신처럼 나도 누군가를 이해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읽은 것을 따라 읽고, 당신이 쓴 내 아버지라는 인물을 베껴 적었습니다. 나중에는 당신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당신이 쓸지도 모를 이야기를 예상하며 써나갔습니다. 나도 몰랐던 내 아버지의 삶을 당신이 썼듯 나도 당신의 내밀한 부분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당신이 연락해올 그날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때라면 내가 당신을 정확하게 이해해왔다는 것을 확인받는 셈이 될 테니까요. 부탁입니다. 나를 만나러 와주기를 바랍니다.
아마도 여전히 내 말을 믿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얼마든지 그 의심을 해소해드릴 수 있습니다. 선생님, 함부로 당신의 책장을 들켜서는 안 됩니다. 내가 아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무얼 쓰든 간에 나는 당신의 입장이 되어 앞으로 당신이 쓰게 될 모든 문장들을 먼저 쓰게 될 것입니다.
---「엿보는 손」중에서
무슨 말이 그래? 뭘 안다고 그렇게 말해? 착하다, 좋다, 그런 건 일종의 상태 아니냐? 그랬다가 안 그러기도 하는 거 아니냐? 그냥 너랑 나 같은 사람이잖아. 그 애가 죽었다고 그렇게 말하는 거야? 넌 아무것도 모르잖아. 원래 질이 나쁜 사람일 수도 있는데 그런 사람이 죽으면 너는 뭐라고 말할 건데? 네가 뭘 안다고 그렇게 말해? 왜 다들 무책임하게 좋았다고만 해? 불쌍하니까, 씨발 존나 불쌍하니까 다 잊어버리고 좋은 것만 생각하라는 거야, 뭐야? 그럼 좋은 사람 이외의 그 애는 다 어디로 가는데? 어떻게 좋은 게 그 애의 전부야? 왜 함부로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
---「좋은 사람」중에서
형이 죽었다. 형이 죽은 것은 예상치 못한 사고 때문이었다. 목격자가 있어서 자세한 정황을 들을 수 있었는데 승합차가 횡단보도를 건너던 형을 치었다고 했다. 공중으로 떠올랐고, 반대 차선에서 달려오던 오토바이가 바닥에 떨어진 형을 밟고 미끄러졌다고도 했다. 오토바이 운전자는 중퇴에 빠졌으나 형은 그곳에서 즉사했다. 나중에 나는 사고 현장을 찾았다가 아스팔트 위로 무언가 고였다 마른 자국을 보았다. 그 자리쯤에 붉은 토끼가 머물러 있었다.
꿈에 토끼를 보았다. 털이 붉어서 기억에 오래 남았다. 그랬는데도 왜 여태껏 모르고 있었나. 아버지가 죽던 날에도 지하방의 그 남자가 불에 타 죽을 때도 모르고 있었다. 꿈에 붉은 토끼를 보았으니 차 조심해라 형, 왜 그렇게 말해주지 못했나.
---「무언가의 끝」중에서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뒤 나는 세주와 크게 싸우게 된다. 하루가 지나기 전에 화해하고 일주일이 되기 전에 같은 이유로 언성을 높인 뒤 연락하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야 드는 생각이지만, 우리는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원했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아니라면 나는 어떤 말로든 세주를 위로했어야 했는데 그때마다 내가 떠올린 것은 겨울에 죽은 그 개뿐이었다.
---「그 개와 같은 말」중에서
잃어버린 것이 있었다. 분명 그날 이후로 은우는 무언가 잃어버렸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은우는 알지 못했다.
어느덧 호숫가의 인적은 바람에 쓸려 간 듯 모두 사라져버렸다.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더 어두운 무영의 형체만 서 있을 뿐이었다. 은우는 묻고 싶었다. 당신이 오역한 문장을 고쳐놓은 것을 보았느냐고. 아직 무영은 그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늦은 가을이었다. 은우는 혼자 남는 일이 가장 두려웠다.
---「거기에 있어」중에서
“모두 내가 저지른 일이라고 믿을 거야. 당신도 봤어야 해. 정말 나랑 똑같이 생긴 사람이었어.”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욕실에 들어가고 식탁에 앉아서 밥을 먹기도 하고 거실을 마음대로 돌아다닌다고 하더라도 그게 자기가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냐는 거예요.
“알 수 있어. 내가 어떻게 당신을 몰라.”
무너지는 남편을 보는 일은 힘들었습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습니다.
“여보, 나는 당신 같지 않아. 당신처럼 유일한 사람이 아니라고.”
---「외」중에서
그들에게 문제가 될 만한 것은 거의 없어 보였다. 당연하고 일상적이며 전혀 도드라진 데가 없는 생활이었다. 이런 식의 사소한 견해 차이조차 어느 가정에서나 겪고 있는 평범한 갈등일 뿐이었다. 다만 그런 것들 가운데 언제든지 다르게 보일 가능성이 남아 있었다. 아무도 없는 거실에서 혼자 자신의 이름을 불러보았을 때 소진은 왜 이제껏 한 번도 그래보지 못했나, 내가 나를 부르는 것뿐인데 무슨 이유로 슬퍼지는가, 전에는 하지 않았던 생각에 빠져버린 적도 있었다.
---「불가능한 세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