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부어오른 연한 갈색 눈이 그를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갈색 머리카락은 한 덩어리가 되어 얼음과 뒤엉켜 있었다. 물고기 한 마리가 느긋하게 헤엄치며, 무슨 말이라도 하려던 것처럼 벌어져 있는 여자의 입술을 꼬리로 치고 지나갔다.
리는 화들짝 놀라서 고함을 치며 펄쩍 뛰다가 보트 창고의 낮은 지붕에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다시 얼음 위로 쓰러진 그는 일어서질 못하고 다리를 허우적거리다가 잠시 정신이 나간 상태로 쓰러져 있었다.
희미하게 빠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겁에 질린 그는 몸을 일으켜 여자에게서 최대한 멀리 도망치려고 다리를 마구 움직였다. 하지만 그의 다리는 얼음 위에서 미끄러지며 허우적댈 뿐이다. 결국 얼음이 깨졌고, 그는 차디찬 물속에 빠지고 말았다. 흐느적거리는 여자의 팔이 그의 몸을 휘감더니 차갑고 끈적끈적한 피부가 그에게 닿았다. 발버둥칠수록 여자의 팔은 더 심하게 엉켰고, 살을 에는 듯한 추위는 살인적이었다.
--- p.19~20
“살인 사건인 건 의심의 여지가 없고, 성폭행한 뒤 교살 또는 익사시킨 걸로 보입니다. 모든 정황을 고려해 봤을 때 초범의 소행이 아닙니다.”
“용의자는 있나?”
“이제부터 열심히 찾아봐야죠. 가족에게 공식적인 신원 확인도 해야 하고요. 현장에 있는 법의학자가 곧 부검을 한다고 하니, 관련해서 계속 보고 드리겠습니다.”
“용의자를 확보했다고 언론에 알릴 수 있다면…….” 마쉬가 말끝을 흐렸다.
“네, 총경님. 저도 압니다. 우선은 가족과 얘기를 나눠 봐야 합니다. 현재로선 면식범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종 당시 목격자도 없었고, 납치 장면을 본 사람도 없으니까요. 여기서 범인을 만났을 수도 있습니다.”
“진정해, 에리카. 앤드리아가 무슨 추잡한 성관계라도 맺었다는 듯 열불내지 말고.”
“추잡한 성관계를 맺었다는 말은 안 했…….”
“명심해, 이건 지체 높은 귀족이 엮인 일이야.”
--- p.45
휴가가 중반으로 접어들면 앤드리아는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에 흥미를 잃는지, 휴가지에서 만난 남자들 사진을 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스토커처럼 남자들이 모여 담배를 피우거나 해변에서 웃통을 벗고 축구하는 모습을 몰래 찍어 올렸다. 또 근육질 몸매에 문신과 피어싱을 한 남자들과 자주 어울렸다. 그러다 마지막 주쯤에는 남자 하나에 꽂혀 거의 집착하듯 한 남자의 사진을 수도 없이 올렸다.
보아하니 앤드리아는 자기보다 나이가 많고 어딘가 어두워 보이는 나쁜 남자 유형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2009년에 찍은 사진에서는 손바닥만 한 비키니 차림의 앤드리아가 거대한 할리데이비슨에 앉아 운전하는 흉내를 내며 포즈를 취했다. 오토바이 소유주로 보이는 검은 머리 청년은 뒷자리로 밀려나 있었다. 그는 한 손을 앤드리아의 엉덩이에 올린 채 담배를 물고 있었는데, 불이 붙은 담배 끝이 햇빛에 그을린 앤드리아 피부에 닿을 듯 말 듯했다. 앤드리아는 ‘내가 왕이야!’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응시했다.
--- p.105
“합의하에 이루어진 성관계와 강제적 성관계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합의한 성관계의 경우에는 몸이 이완되는데, 강제적 성관계는 극도의 스트레스와 두려움, 저항을 동반할 때가 많아서 근육이 긴장하고 뭉치기 때문에 내적 타박상 및 찰과상을 일으킵니다. 피해자의 경우, 직장 내벽까지도 아무런 손상이 발견되지 않았어요. 물론 사후에 성관계가 이루어졌다는 가설도 생각해 볼 수는 있지만요.”
“맙소사, 제발. 그건 아니길요.” 에리카가 절망적으로 말했다.
--- p.116
“얼굴만은 건드리지 말아 줘. 내가 별 볼일 없게 생긴 건 알지만, 그래도 이 얼굴이 사는 걸 더 편하게 해 준달까…….”
바로 그때 내가 재빨리 아이비의 얼굴을 때렸지. 딱히 놀라는 것 같진 않았어, 그저 실망한 듯 보였을 뿐. 내가 다시 더 세게 때리는데도 아이비는 그 상황을 운명에 맡기는 것처럼 보였어. 수도 없이 겪었을 실망들에 추가된 또 하나의 실망. 나는 아이비의 머리카락을 한 줌 뽑았고, 코를 부러뜨렸지……. 내가 양손으로 일 분 넘게 목을 조르고 나서야 놀란 표정을 짓더군. 그제야 자기가 죽을 거란 걸 깨달았겠지.
--- p.225~226
거리로 나온 에리카는 버스나 택시 정류장을 찾았다. 하지만 붐비는 순환 도로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루이셤 역을 향해 걸으며 혹시 가방 안에 흘린 잔돈이 없나 뒤져 봤지만 가방 안에서 나온 거라고는 신용카드 몇 장뿐이었다. 다시 가죽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어 구깃구깃 쑤셔 넣어 둔 티슈와 쓰레기를 뒤적이는데, 작고 네모나고 뻣뻣한 게 손에 닿았다. 두껍고 비싸 보이는 작은 흰색 봉투였다. 앞면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봉투를 뒤로 뒤집은 에리카는 손가락을 덮개 밑에 넣고 봉투를 열었다. 반으로 접힌 종이가 들어 있었다.
에리카는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 옆에 우뚝 멈춰 섰다. 마크와 그녀의 동료 넷이 목숨을 잃었던 마약범 급습 사건에 관한 신문 기사를 인쇄한 종이였다. 한 사진에는 로치데일에 있는 그 집 앞길에서부터 집 안의 피 웅덩이와 유리 파편 위에 하얀 천으로 덮인 채 누워 있는 시신들까지 찍혀 있었다. 또 다른 사진은 집 위에 떠 있는 경찰 헬리콥터가 에리카의 동료 둘─후에 병원에서 사망했다.─을 끌어올리는 장면이었고, 해상도가 낮은 흑백사진에는 누군지 알아보기 힘든 경찰관이 피에 흠뻑 젖은 채 들것에 누워 한 손을 겨우 들고 있었다. 그건 바로 마크 생전에 마지막으로 찍힌 사진이었다. 그 사진 위에는 빨간색 매직펜으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랑 똑같군, 포스터 경감. 우리 둘 다 다섯 명을 죽였으니.
--- p.237~238
밖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주변의 들판과 소택지들도 보이지 않았다. 달도 별도 보이지 않았다. 그 어떤 빛도 없었고, 둥근 전조등 불빛에 비친 눈앞의 도로만이 보일 뿐이었다. 에리카는 바르보라의 축 처진 몸이 나무에 삐걱대며 매달려 있던 그 음침한 땅에서 멀리 벗어나고 싶었다. 수많은 건물이 서 있고, 시끌벅적하고, 시간이 멈추지 않는 도시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에리카가 조수석 위에 달린 거울을 잡아당기자 불이 반짝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에는 진흙이 묻어 있었다. 뒷좌석에 앉아 있는 피터슨의 얼굴이 거울에 비쳤다.
“여전히 쉽지 않죠, 보스? 죽은 사람을 보는 거요.”
“응, 정말 그래요.”
에리카가 티슈로 진흙을 닦아 낸 뒤 거울을 닫았다. 차 안이 다시 어둠에 휩싸였다. 남은 길을 달리는 내내 그들은 그날 밤을 위한 힘을 비축하려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p.3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