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몸에서 기운이 쑥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그것 봐……’라고 중얼거린 것도 같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사람들은 등에 숫자를 가지고 있고 숫자가 1이 되면 그 사람은 죽음을 맞는다. 내 눈에 그것이 보인다. 중환자실에서 이미 한 번 겪지 않았나? 하지만 쐐기를 박듯 다시 이런 일을 보게 되자 맥이 탁 풀렸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다. 눈을 뜨고 있을 기력마저 없었지만 나는 새삼스레 주변을 둘러봤다. 모든 사람이, 복도에 왔다 갔다 하는 모든 사람, 환자들, 보호자들, 의사와 간호사들, 밥차를 밀고 다니는 아주머니들이 모두 다 등에 숫자를 달고 있었다. 하루가 지나면 하나씩 줄어드는 숫자. 하루가 지나면 하루만큼 줄어드는 수명. 녹색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백넘버. 한 사람도 예외가 없었다. 한 사람도. 단 한 사람도? 그렇다면. 나는? 내 등을 봐야 했다. 나의 백넘버를 확인해야 했다. 나는 살 수 있나? 살아서 이 병원을 나갈 수 있나? 살 수 있다면 그건 언제까지인가. --- p.83
수명 늘리기 대회에라도 나간 것처럼 오래 살기 위해 기를 쓰는 사람들이 있지만 삶의 길이라는 것은 개인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아무리 애써도 주어진 삶의 길이를 늘일 수는 없다. 하루에 필요한 필수영양소를 꼼꼼하게 섭취하고 운동하고 명상하고 수백만 원짜리 보약을 챙겨도 그것이 삶의 길이에 관계하지는 않는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건 삶의 길이가 아니라 삶의 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