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극적으로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할 수 있어야 하고, 계급이나 지역 등 집단적 정체성과 역사 역시 그들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 돌이켜보면 나의 공부는 사회 운동을 하기 위한 학습의 필요성으로부터 출발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 두 지향이 완전히 분리되는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리고 두 영역의 공통분모가 있다면 바로 구술사 또는 질적 연구라고 생각한다. _ 46쪽, “구술생애사 방법론 워크숍에 대한 회상”
나는 기본적으로 객관적 진실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의심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객관적 진실을 찾기보다는 상황적 진실을 추구하고자 하며, 상황적 진실을 통해 사건 전체의 윤곽을 재구성함으로써 비로소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러한 나의 생각을 구현할 수 있는 방법론으로서 질적 연구 방법을 선택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이 과정에서 물론 많은 어려움과 좌충우돌이 있고 실패도 있었고, 앞으로도 쭉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적 연구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것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결국은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며, 그것이 나를 연구자로 만드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_ 76쪽, “양적 연구자의 질적 연구 좌충우돌 경험”
연구자는 논문이든 저서든 특정한 연구 결과물을 생산해내야 한다. 하지만 그는 단지 논문 생산자의 역할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는 현장과 그곳의 여러 존재들과 함께 상호작용하면서 여러 은폐된 사실과 모순들을 드러내는 데 동참하는 존재다. 다만 연구자는 그것을 글로 표현해 남길 뿐이다. 연구자는 정치가도 예언가도 아니다. 그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새로운 윤리를 모색하도록 불특정 다수의 마음을 부추기는 존재다. _ 105쪽, “‘평범한’ 존재를 ‘특별하게’ 대해야 하는 불가피함”
이같이 질적 연구에서 연구 참여자들과 상호작용하면서 느끼게 되는 감정들은 연구자의 ‘이성’과 분리될 수 없고 연구 과정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질적 연구의 출간물, 특히 학술지 논문에서 구체적으로 잘 언급되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질적 연구에서 연구자는 ‘초월적 관찰자’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어떤 형태로든 ‘입장지어진 주체’로서 연구 참여자들과 상호작용하면서 끊임없이 다양한 감정들을 느끼게 되고, 이 감정들은 연구 과정 곳곳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질적 연구자가 특정한 감정을 느끼게 될 때마다 그 감정이 어떤 감정인지, 그 감정을 왜 느끼게 되었는지, 그 감정으로 인해 자신의 연구 과정이 어떻게 변화되는지를 성찰하는 것은 질적 연구의 질을 높이는 데 필수적이라고 볼 수 있다. _ 135쪽, “연구 참여자와 상호작용으로 나타나는 연구자 감정들”
사실 나를 포함한 많은 연구자들이 상대하기 편한 응답자들만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해 그들의 목소리만을 반영한 연구 결과를 내놓기 일쑤다. 상대하기 편한 응답자는 연구자와 유사한 계급적 배경, 교육 수준, 언어를 공유하고, 사회 조사의 상황과 작동방식에 관한 이해가 잘되어 있는 응답자를 말한다. 앞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이들은 조사라는 양식화된(stylized) 사회적 상호작용의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알고, 상황에 적합한 반응을 제공한다. 연구자들은 이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이러한 능력을 갖춘 이는 소수에 불과하다. 때로는 이러한 능력을 가졌다 해도 연구자와 맺는 관계의 특성으로 인해 조사가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젠더와 계급은 이러한 난점이 발생하는 대표적 지점들이다. _ 154~155쪽, “나의 현장 조사에 관한 기억들”
최근 현지조사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대학에서 현지조사 관련 강의를 자주 하게 된다. 학생들과 현지조사 실습과 토론을 하다 보면 간혹 놀라는 부분이 있는데 학생들이 자신을 이주민과 구분 짓고 마치 자신을 이주민 정책의 입안자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정부나 매스컴에서 이주민을 다루는 시선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이 학생들에게 강조하고 싶은 말은 무엇보다 현지인들과의 신뢰 관계를 쌓으라는 것과 이주하는 사람들의 삶의 맥락을 따라 이주민의 삶의 감각을 익히라는 것이다. _ 184~185쪽, “이동하는 현장을 따라서”
현장연구는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2년 정도 치킨만 먹고 돌아다녔다고 보면 맞다. 다만 인터뷰를 할 때의 겸손한 자세와 인터뷰 당사자의 삶과 친밀해지기 위한 수련 과정에는 많은 공을 들였다. 1년 넘게 치킨집 창업 온라인 카페에 참여했던 경험은 적어도 치킨집에서 쓰는 일상용어에 익숙해지는 일종의 ‘어학연수’ 기간이었다. 예를 들어 ‘칙카이드(염지 작업용 용액)’라는 말을 아는 인터뷰어와 그렇지 못한 인터뷰어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_ 206~207쪽, “치킨으로 펼쳐 본 사람과 사회”
당시 연구 기획은 문헌 연구를 통해 드러난 기존 연구의 빈 고리와 프로젝트의 전체 연구 방향, 나의 고민과 문제의식을 반영하고 있었다. 대부분 기존 연구에서 거의 다루지 않았던 주제였기 때문에 연구의 필요성이나 가치는 충분했다고 본다. 그러나 이것이 함정이라면 함정이었다. 연구의 필요성만으로 연구가 가능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오랫동안 방치된, 혹은 잊힌 연구 주제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1, 2차 자료에 대한 검토뿐만 아니라 현장연구의 가능성까지 기본적으로 살펴야 한다. _ 225쪽, “한국의 베트남 전쟁 기억 두껍게 읽기”
자신과 관련된 사건이라고 해서 피해자 또는 증언자가 반드시 당시의 상황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증언에는 자신이 체험한 것과 주장, 감정이 혼재되어 있다. 학계의 연구나 시민단체, 언론의 보도보다 앞서 진실을 파헤치려고 노력한 연구 참여자를 제외하면, 많은 경우 연구 참여자들의 구술은 사회에 통용되는 정보나 지식을 반영한 채 재생산된다. _ 265쪽, “역사적 사건과 생애 연구”
무슨 말이냐면, 그동안의 현지조사 방법은 연구 참여자와 연구자의 좋은 신뢰 관계를 위해 둘 사이의 문제를 최소화하는 연구자 태도의 문제를 강조해왔는데 ‘상호행위분석(ethnomethodology)’의 관점에서 보면, 라포를 확립하거나 조사 방법 매뉴얼대로 능숙하게 인터뷰를 진행하는 등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질적 자료의 수집 과정은 이야기하는 사람과 묻고 듣고 기록하는 연구자 간의 협동 작업인데, 연구자와 연구 참여자의 관계에서 사실상 자유로운 조사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질적 연구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문제와 경험에 대해 각도를 바꿔서 접근한다면 문제 그 자체가 연구자와 연구 참여자 간의 관계에 대해 풍부한 시사점을 주는 자원이 된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_ 281~282쪽, “가족계획사업의 기억이라는 영역과 ‘나’”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