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 살이라고 했어?”
이번에는 남자가 먼저 조심스럽게 미사에게 물었다.
“네. 고 2요.”
“그럼 그 후 십 년 동안의 일은 전혀 기억나지 않아?”
“조금도요.”
“나에 대해서도, 전혀?”
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뭐지?”
“강릉으로 수학여행 갔는데 저희 반에 좀 노는 애들이 있거든요? 걔네들이 술 사오라고 해서 선생님들 몰래 나갔어요. 그러다 돌아오는 길에 잠깐 하늘 쳐다보고 있다가 그만 차에 치여서 정신을 잃었고요. 그리고 일어나 보니까 병원이었어요. 그게 다예요.”
미사는 빠르게 대답하고는 되물었다.
“대체 저한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아세요?”
“오늘 낮에 나하고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어.”
이번에는 남자가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네가 길 건너편에 있는 나를 보고 급하게 길을 건너다 그만 갑자기 달려온 차에 치였어. 살짝 치인 거였는데 머리를 땅바닥에 부딪친 건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더군. 그래서 그대로 업고 병원으로 뛰었지.”
그가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한 삼십 분 정도 기절해 있다가 눈을 뜨더니 갑자기 날 알아보지 못했던 거야.”
미사가 기억하는 사고와 남자가 말하는 사고가 전혀 다르다. 그리고 두 사고 사이의 십 년이 깨끗이 날아가 있었다.
“그럼 제가 뭐 타임머신을 타고 갑자기 미래로 뿅, 하고 날아온 건 아니라는 거네요?”
“그렇지. 그냥 십 년 동안의 기억을 잃은 것 같아.”
상황이 너무 비현실적이어서일까, 아니면 눈앞에 앉아 있는 남자가 영화배우 뺨치게 생겨서일까. 이젠 피식피식 웃음까지 나왔다. 꼭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기억상실이면 고칠 방법도 없지 않나요?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늘 그러던데요.”
“정확한 건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봐야겠지.”
그러고 나서 남자는 위로하듯 말했다.
“너무 걱정할 것 없어. 아마 일시적인 현상일 거야.”
“그랬으면 좋겠네요. 근데 아저씬 이름이 뭐예요?”
“정윤하라고 해.”
정윤하, 정윤하……. 미사는 그의 이름을 입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하지만 역시나 기억나는 것은 없었다. 아무것도.
“죄송하지만 제가 아저씨 말을 무턱대고 믿을 수는 없는 입장이거든요.”
당돌하게 말하는 미사를, 윤하는 팔짱을 끼고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증거가 필요해요. 제가 아저씨하고 결혼했다는 증거 말이에요.”
잠시 생각하던 윤하가 자기 손을 들어 보였다.
“자, 이게 우리 결혼반지.”
그의 손가락에는 희게 빛나는 단순한 모양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런데 저는 왜 안 끼고 있는데요?”
“미사 네 것은 사이즈가 조금 크게 만들어져서 다시 조정하는 중이야.”
그럴듯한 말이었지만 증거라기에는 아무래도 부족하게 느껴졌다.
“또 다른 건 없어요?”
윤하가 슈트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지갑에서는 작은 사진 한 장이 나왔다.
“자.”
그가 내미는 사진을 받아 들여다본 순간, 미사는 숨을 삼켰다.
“……!”
웨딩드레스를 입고 하얀 베일을 쓴 채 카메라를 향해 미소 짓고 있는 신부. 틀림없는 미사 자신이었다.
“드레스를 고르러 갔던 날 찍었던 사진이야.”
기억에 없는 자신의 웨딩드레스 차림을 보는 것은 꽤나 큰 충격이었다. 한참 동안 사진을 들여다보던 미사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혹시 결혼식 사진도 지금 갖고 계세요?”
“사정상 아직 정식으로 결혼식은 올리지 않았어. 혼인신고만 먼저 해둔 상태야.”
윤하가 조용히 대답했다.
“집에 가면 웨딩 촬영 사진이 있어. 혼인신고서도. 신고하면서 기념으로 사본을 남겨둔 거야.”
혼인신고까지 했다면 법적으로 진짜 부부다. 더는 부정할 수도 없었다.
‘맙소사, 아직 남친도 안 사귀어 봤는데 남편이라니!’
충격에서 벗어나려 애쓰며, 미사는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있잖아요. 저 최종학력이 어떻게 돼요?”
“한국대학교 영어교육과 졸업.”
미사는 깜짝 놀랐다.
“대학을 나왔다고요? 제가요? 확실한 거예요?”
“집에 가면 졸업사진을 보여주지.”
가슴이 마구 뛰었다. 바로 어제까지도 자신이 대학에 갈 수 있을 거라고 감히 상상조차 못 했었는데!
“직업은요? 저 뭐 하는 사람이에요?”
“교원자격증 취득 후에 임용 준비하면서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어. 지금은 결혼 때문에 잠시 쉬는 중이고.”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쭉 미사의 꿈은 선생님이었다. 고아라고 은근히 차별하거나 무시하는 선생님들을 만날 때마다 오히려 꿈은 더 확고해졌다. 나는 꼭 좋은 선생님이 돼서, 나같이 어려운 학생들을 도와주어야지.
‘나, 꿈을 이뤘구나.’
미사는 눈물이 날 것 같은 것을 꾹 참았다. 아직 물어야 할 것들이 더 남아 있었으니까.
“제가 자란 보육원은 어떻게 됐는지 혹시 아세요?”
“원장이 비리 혐의로 감옥에 갔고, 그 후로 없어졌다고만 말했었어, 네가.”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같이 지내던 동생들, 특히 그 중에서도 제일 어린 예지가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미사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했다.
모두들 좋은 시설로 갔을 거야. 하기야 어딜 가더라도 우리 원장보단 나았을 테니까.
자, 이제 가장 중요한 것들에 대해서는 모두 들었다. 그리고 미사는 결정을 내렸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에 대한 결정을.
미사는 허리를 곧게 펴고 윤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우리가 부부라, 이 얘기죠?”
“그래.”
확인하듯 다시 묻자 윤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혼인신고 다 끝났다고도 했어요. 그러니깐 반품불가! 제가 하나도 기억 못 한다고 해서 없던 일로 하자고 하기 없기예요?”
“그렇다니까. 물론 당장은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뭐?”
말하다 말고 흠칫 놀라 쳐다보는 윤하의 얼굴을 보며, 미사는 생긋 웃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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