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셋.
엄마가 퇴근하면서 지하철에서 전동차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연말인지라 남들은 다 흥청대는 것 같은데 자기는 여유도 없는데다 날씨조차 으스스해서 우울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라? 저쪽에서 그다지 낯이 설지 않은 듯한 할머니가 차비 좀 보태 달라면서 서 있는 사람들을 보채며 이쪽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기분도 영 그러한지라 빨리 전동차가 도착했으면 싶었으나 야속하게도 할머니가 먼저 도착하고 말았습니다. 눈치 백단도 넘는 할머니가 만만해 보이는 중년 여성 고객을 그냥 보낼 리 없지요. 어쩔 수 없이 천 원짜리 한 장 주고는 얼른 상황을 벗어나려고 지갑을 꺼내 펼쳐 보니 아뿔싸! 하필 만 원짜리 두 장만 달랑 들어 있었습니다. 난감한 중에 한 장을 빼주고는 뒤돌아서 곧이어 도착한 전동차에 올랐습니다만 쓰린 마음이 저녁 내내 가시지 않았습니다. ‘내 형편에…내 주제에…왜 맨날 나는…!’ 한두 번 겪은 일도 아니었지만 그날따라 영 기분이 언짢았습니다.
결국 잠자리에 들 때 함께 누운 막내딸에게 고백을 하고 맙니다. 너한테 미안하구나! 그 돈으로 네가 좋아하는 반찬이나 과자를 사주는 건데, 그만…! 그런데, 그 할머니가 내 뒤에다 대고 “기도해 드릴게요!”라고 하시더라! 뭐, 설마하니 기도해 주시겠어? 그냥 해본 말씀일 테지! 아무튼 미안해! 미안해!
마주 보고 누워서 가만히 바라보며 듣고 있던 막내딸이 엄마의 팔을 당겨 목에 두르면서 “괜찮아요, 엄마! 그래요! 그 할머니가 기도해 주지 않으셨을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엄마! 하나님은 분명히 그때 그 말씀을 들으셨을 거예요!” 뭐…??? 이런이런! 얘가 천사야? 내 딸이야? 엄마는 눈물을 글썽이며 딸을 꼭 끌어안았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수없이 되뇌이면서….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들의 모든 행위대로 행하사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 (열왕기상, 8:39)
암! 하나님이 그 할머니가 한 말씀만 들으셨겠어? 네가 한 말도 분명히 들으셨을 거야! 그럼! 그럼! 가끔 하나님은 영혼이 맑은 어린아이를 통해 당신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가장 신실했던 그분의 것이 되기 위해(Sincerely yours)!
[2]
텔레비전 오락 프로에 종종 우스꽝스런 소재로 등장하던 신병훈련소의 직각식사를 한국에선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2019년 육군본부 내 인권서포터즈단이 이 직각식사를 ‘악폐습’으로 지적하는 바람에 없애버렸습니다.
직각식사는 70여 년 전 미군이 가르쳐 준 것으로 당시 한국인들 간에 전혀 그 개념이 없었던 소통의 리더십 계발을 위해 장교 간, 그리고 사병 간 상대방 눈보기 훈련 방법으로 식사 시 바로 앞에 있는 동료의 눈을 보게 하기 위해 고개를 바로 세운 상태에서 밥을 떠먹도록 한 것입니다. 한데 이것이 그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절도 있는 자세, 즉 군인 정신을 함양한다는 거창한 것으로 잘못 인식되어 왔습니다.
전통적으로 서구에서 지휘관(장교)은 중상류층 출신으로 성숙된 사회적 인격체임이 이미 자리잡고 있습니다. 한데 현대에 이르러 자원 입대하는 사관생도나 사병은 대체로 리더로서나 공동체 구성원으로서나 사회성 기본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통 방법론 등 공동체 규율을 서둘러 체화시키기 위해 직각식사 등 절도 있는 자세와 동작을 혹독할 정도로 익히게 했던 것이지요. 물론 그 외양상의 절도 있는 동작의 최종 목적은 피차의 목숨을 지켜 줘야 하는 전투 공동체 내의 소통과 리더십 배양에 있습니다. 이게 되어야 전투력 향상과 전쟁 승리를 장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사(지휘관이든 병졸이든)가 동료는 물론 적의 눈을 자동적으로 주시하지 못하면 어찌되겠습니까?
기역자 식사 훈련의 궁극적인 목표점은 절도가 아니라 소통입니다. 건너편의 상대와 마주 보면서 대화하고 소통하며 식사하라는 본디 목적을 이해 못하고, 70년 동안 맹목적으로 그 동작만 따라 하다 보니 기형적이고 형식주의적이고 관료적인 악습의 하나로 굳어져 내려온 것이겠지요. 게다가 식불언(食不言)이란 반문명적 전통 관습까지 보태는 바람에 마치 공장의 로봇들과 같은 비인격적 행태를 연출한 것입니다. 입속에 음식이 있을 때 말을 하여 보기 흉한 모습을 연출하지 말란 식불언을 식사 시간 내내 말을 하지 말란 것으로 오해 아닌 오해를 한 것이지요.
바른 자세여야 상대방은 물론 식당(전장) 전체를 조망하고 소통하며 통솔하는 리더십이 길러집니다. 직각식사란, 한 술 한 술 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건배하듯 눈높이로 올려 마주앉은 상대방과 눈을 맞추고 먹으라는 소통 매너입니다. 아무렴 이 직각식사로부터 다시 악수나 건배, 차를 마실 때, 회의를 할 때에도 상대방을 주시 · 주목해서 동시적으로 소통과 피드백이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해서 바른 자세와 상대방과의 눈맞춤이 익숙해지면 굳이 직각이 아니어도 상관없겠지요.
[3]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창세기, 3:6-7)
만물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옷을 입습니다. 부끄러움을 알기 때문이지요. 하여 태초에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를 에덴의 동쪽으로 내치실 때 손수 지어 입히셨습니다. 옷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옷을 입는다는 건 하나님의 자녀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거룩하고 은혜받는 일입니다. 옷은 매너의 시작입니다.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내리더라.’ (요한복음, 21:7)
베드로가 고기를 잡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벗어두었던 겉옷을 입고 물속으로 뛰어들어 예수에게로 건너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약간 의아해하면서도 깊이 생각지 않고 그냥 넘겨 버립니다. ‘아니, 물로 뛰어들려면 입었던 옷도 벗을 일인데, 왜 도로 걸쳐입었을까?’
주일 예배하러 가는 사람들을 보면 복장이 말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반바지 · 반팔 · 등산복 · 추리닝 ㆍ 패딩 바람으로 교회에 가는 민망한 이들도 있습니다. 복장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 하나님을 뵈러 오다니…? 동방예의지국 백성이 맞나? 예배당은 성소이기 전에 공공 공간입니다. 최대한 갖춰입되 단정해야 하고, 아웃도어는 로비에서 벗어드는 것이 예의입니다. 그런가 하면 짙은 화장에 요란하게 치장을 해서 예배하러 가는지 사교장에 가는지 구분이 안 되는 이들도 간혹 있습니다.
[4]
19세기에 파리에서 일어난 시민들의 폭동을 진압하던 중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장교가 ‘불한당들’에게 총을 발사하여 광장을 비우게 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는 부하들에게 사격자세를 취하게 하고, 군중을 향해 총을 겨누도록 하였습니다. 한순간 정적이 감돌고 있는 가운데 장교는 칼을 뽑아들고 이렇게 외칩니다. “여러분, 저는 불한당들을 향해 발사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 앞에는 점잖고 훌륭한 시민들이 많이 계십니다. 이분들은 빨리 이 자리를 뜨셔서 제가 안심하고 사격을 할 수 있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곧 광장으로부터 철수하였습니다.
군중과 군대의 대치 구도에서 빠져나와 신사와 불한당이라는 새로운 틀을 짜서 군중들을 그 속에 가둠으로써 판을 바꿔 문제를 해결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제까지 강제해 왔던 전통적인 선비 정신, 인성 교육으로는 현재 한국 사회에 만연한 비도덕적이고 비인격적인 온갖 문제와 상식을 무시하고 벌어지는 몰염치한 갈등들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럴수록 상황을 악화시킬 뿐입니다. 판을 바꾸는 변화가 필요합니다. ‘품격경영’은 ‘새틀짜기’ 프로그램입니다. 글로벌 매너는 그 도구가 될 것입니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