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같은 복장에 마오의 어록을 손에 쥐고 한결같은 구호를 반복하는 홍위병들의 표정은 단 하나였다. 광기와 파괴 본능에 장악된 사이보그 같은 얼굴들. 훗날 국제미술계의 스타로 떠오른 작가 웨민쥔과 장샤오강은 이 소름 끼치는 장면을 복제 인간처럼 똑같은 표정으로 웃는 얼굴을 한 군상으로 조롱하거나, 무표정한 인물들의 초상으로 승화시켰다. 이처럼 한 시대의 광기는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그림 속에서조차 다양한 얼굴을 찾아보기 힘들게 만들었다.--- p.33 「광장, 중국 현대미술의 매트릭스」
여성의 누드는 판위량이 평생 추구한 테마였다, 그녀는 누드화를 통해 자신은 물론 중국 여성들을 얽어매던 낡은 습속을 떨쳐내고 해방시키고 싶었던 것 같다. 확실히 그녀의 누드화는 동시대 남성 화가들의 그것과는 다르다. 그림 속의 여성들은 벌거벗고 있지만 성적 대상이 아닌 주체적이고 건강한 여성의 육체를 찬미하려는 의도가 짙게 배어난다. 자유자재로 구사한 전통화의 붓놀림과 선명하고 화려한 색감은 삶에 대한 강렬한 의지로 읽힌다. 또한 앞에서 언급한 두 남성(쉬베이홍, 루쉰)이 구국을 위한 도구로 미술을 이용했다면, 판위량에게 미술이란 온전히 자기 자신의 치유를 위한 주술적 행위로 보인다.
서양화가로서 그녀의 자질은 본고장 유럽에서도 통해 파리 현대미술관에서 최초로 구입한 중국 작가의 작품이 바로 판위량의 조소작품이었다. 오늘날 그녀의 작품이 국제 경매시장에서 천문학적인 가격으로 거래되고 인정받는 것도 판위량만의 예술성 덕분일 것이다. 그녀의 인생은 그 자체로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마음속 깊이 공감하게 만든다. 불행한 개인사를 극복하고 구시대의 관습과 싸워 끝내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쟁취한 한 여성 예술가의 ‘화혼’에 대한 찬미와 예우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p.167 「중국 근현대미술의 얼굴들」
1985년은 중국 현대미술의 원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85신조’ 혹은 ‘85미술운동’이라 불리는 이 미술운동은 2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전국에서 2,250여 명이 넘는 아티스트가 속한 79개의 독립 아방가르드 예술단체가 무려 149차례의 전시와 컨퍼런스를 조직하고 선언문을 작성한 대사건이었다. 중국 현대미술의 지형도를 다시 그린 아방가르드 미술의 전사들과 함께 격동의 현장으로 돌아가보자.--- p.186 「거센 물결, 새로운 물결」
청년 작가들의 전시와 교류가 절정에 달한 1985년, 학자이자 큐레이터인 가오밍루高名潞는 ‘새로운 물결’이라는 뜻의 ‘85신조新潮’(85신차오)라는 용어를 만들어낸다. 85신조는 20세기 중국 현대미술사에 큰 획을 그은 대사건 중 하나다. 이를테면 중국 전역에서 선명한 주장과 관점을 지닌 미술가들이 미술단체를 조직해 합종연횡해서 주류 미술문화와 일대 전면전을 벌였다고 볼 수 있다. 싱싱화회가 아마추어 화가들의 모임이라고 한다면, 이들 대부분은 모두 미술대학 출신의 전업 화가들이었다.
이 대규모 운동은 1986년 이후에는 더욱 도발적이고 개념미술에 가까운 성격을 띠게 되었다. 마침내 1989년 베이징 중국 미술관에서 《차이나/아방가르드전中國現代美術展》이 열린다.--- p.187 「거센 물결, 새로운 물결」
문화대혁명 시절 중국인민들이 가장 많이 접한 이미지는 바로 마오의 얼굴이었다. 이 시기 마오는 신격화되고 그의 이미지는 ‘붉은 태양’으로 자리매김하여 일종의 이콘(성화)처럼 변해갔으며, 물신화도 피해 갈 수 없었다. 모든 문학, 공연, 미술 등 전 예술 분야에 마오 양식이 강요되었고, 이는 전 인민의 뇌리에 각인되어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했다. … 어쨌든 마오쩌둥의 얼굴은 톈안먼 광장에 걸린 대형 초상화 속에서도, 예술작품 속에서도, 관광지의 티셔츠나 시계 심지어 속옷이나 콘돔 같은 일상용품 속에서도 마구 재생산되어 물신화되어버린 상태다.
― 208쪽(중국 현대미술의 파르마콘, 마오쩌둥)
당시 모든 시각예술은 마오의 아내 장칭이 선포한 원칙에 따라야 했는데, 여기서 벗어나면 가차 없이 탄압을 받았다. 미술계의 원로로 만인의 존경을 받고 있던 근대회화의 선구자 린펑몐林風眠이나 판톈서우潘天壽를 비롯해 리커란, 스루石魯와 같은 전통 화가들도 문혁 때 고초를 겪었다. 이유인즉, 그들의 그림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대세를 따르지 않았고, 부르주아의 퇴폐성을 담지했다는 것이다. 이런 화가들의 작품은 ‘흑화黑畵’로 분류되어 탄압받았다.
--- p.232 「중국 현대미술의 파르마콘, 마오쩌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