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고상한 노년도, 추잡한 노년도, 그리고 가련한 노년도 있기 마련이다. 고상함과 추잡함이 공존하는 노년도 있다. 거세마의 노년이 바로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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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늙었고 그들은 젊었다. 그는 여위었고 그들은 기름졌다. 그의 삶은 무료했고 그들의 삶은 유쾌했다. 그리하여 점점 더 그는 완전한 타인, 이방인, 그래서 동정할 수조차 없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가야만 했다. 말들은 오롯이 자기애(自己愛)만 지닌다. 다른 말들에 대한 동정은 어쩌다 가끔, 그것도 가죽 털 모습에서 쉬이 자기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말들에게만 느낀다. 그렇지만 늙고 여위어 흉한 몰골이 된 것이 어디 얼룩빼기 거세마의 탓이랴. 그렇지 않으리라. 그러나 말들의 세계에서 그는 유죄였다. 오로지 강하고 젊고 행복한, 그래서 앞날이 창창하고 무심코 준 힘에도 온 근육이 전율하며 말뚝처럼 꼬리가 치솟는 말들만이 무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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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디부터 진지하고 생각이 많은 편이지만, 이제는 그야말로 일생일대의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말았다. 사람들로 하여금 괜스레 경멸감을 불러일으키는 내 얼룩, 예기치 않게도 묘하게 꼬여버린 나의 불행, 그리고 사육장에서 내가 느꼈던 남들과는 다른 처지, 이 모든 것들로 인해 나는 더 깊은 상념에 잠기게 되었다. 나는 얼룩빼기라는 이유로 나를 함부로 비난하는 사람들의 부당한 태도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모성애, 아니 여자의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변덕스럽고 외적인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가에 대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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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나는 나를 특정인의 소유로 부르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전연 납득할 수 없었다. 살아있는 말(馬)인 나를 두고 나의 말이라고 부르는 것은 나의 땅, 나의 공기, 나의 물이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게는 이상하게 여겨졌다. … 인간들 세계에서 매우 중요하게 간주되는 말들의 중심에는 나의, 내 것의, 나만의 라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온갖 사물과 생명, 대상에 상관없이 이 말들을 갖다 붙인다. 심지어 땅도, 사람도, 말(馬)도 그 대상이 될 지경이다. 그게 그거인 똑같은 물건을 두고도 단 한 사람만이 나만의 것이라는 말을 할 수 있게 약속을 해댄다. 그리고 그들끼리 정한 이와 같은 내기에서 나의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대상을 가장 많이 선점한 사람을 최고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여긴다. 도대체 왜 그러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들 한다. 예전엔 나도 어떻게든 좋게좋게 해석해 보려고 오랫동안 노력했으나 역시 부당한 듯하다.
--- p.48~49
그러나 이상한 점은 내가 자기의 말이 아닌 마구간 대장 소유의 말이라고 여기는 까닭에 나의 보조 또한 그들에게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는 사실이다. … 이러한 모든 차이는 내가 얼룩빼기인 탓에 비롯되었으며,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으로 볼 때 내가 백작이 아닌 마구간 관리 대장 소유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내일의 삶이 주어진다면 마구간 관리 대장이 생각하는 그 소유권으로 인해 내 인생에 어떤 중요한 파장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들려주도록 하겠다.
--- p.52~53
비록 그가 나의 파멸을 초래한 장본인이자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단 한 번도 사랑할 줄 모르던 사람이었으나, 나는 그래서 그가 좋았고 지금도 좋아한다. 잘생기고, 행복하고, 부유했기에 그 누구도 사랑할 필요가 없었던 점이 나는 좋았다. 그대들도 말들만이 느끼는 이와 같은 고상한 감정을 이해하리라. 그의 냉정함과 무정함이 그에게 의존하는 나의 마음과 결합하면서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이 어떤 특별한 힘을 자아냈다.
--- p.57~58
주인은 자신의 말(馬)이 아닌 다른 말에 대한 이야기가 들리자, 아예 들을 생각도 않고 딴청을 피우다 자기의 말 떼만을 계속 쳐다보았다. 불현듯 허망하고 무력한 노쇠마의 울음소리가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 무색해 하며 울음을 삼킬 듯하면서도 멈추질 못하는 얼룩빼기 홀스또메르의 울음소리였다. 그러나 손님도, 주인도 아랑곳하지 않고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홀스또메르가 이제는 늙어 축 처져버린 노인이 자신이 사랑했던 옛 주인, 한때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고 부유했던 세르뿌홉스꼬이 공작임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 p.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