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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9년 05월 18일
쪽수, 무게, 크기 256쪽 | 332g | 135*207*20mm
ISBN13 9791157954537
ISBN10 1157954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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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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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꾸는 꿈이었다. 장소는 항상 안개가 깔려있는 숲속으로 어떻게 해서 50대 중반의 사내가 그 곳까지 들어가게 됐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시작부터 그는 그곳에 갇혀 있었으니까. 안갯속을 스멀스멀 돌아다니는 바이러스 같은 그 무엇이 공포를 부추겼다. 보통 이런 꿈의 결말은 잔인하고 충격적으로 지금 당장 진행을 멈추지 않으면 사내는 끝내 비명을 지르며 죽음에 이를 것이다.
갑자기 괴이한 기운이 사내의 몸을 휘감는 그 순간 여러 발의 총성이 들려왔다. 사내는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20대 초반 군복차림의 남자가 M16을 쏘며 누군가를 뒤쫓고 있었다. 빠른 발자국 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왔다. 결국 사내의 눈앞에서 우려했던 일들이 벌어졌다. --- p.7

누구나 인생에서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시절이 있다. 일기를 쓴 여자에게도 그 시절은 첫사랑의 그 지점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또박또박 써 내려간 글씨체에서 그녀의 풋풋하고 들뜬 마음이 지혜에게도 전달됐다. 그때나 지금이나 첫사랑은 하나도 다름이 없었다. 더구나 시골에서 태어나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곳을 떠나본 적이 없는 그녀에게는 더욱 그러했으리라.
그 첫사랑은 지혜에게도 그랬다. 추운 겨울이 물러난 온기가 하나도 없는 그 자리에 남쪽으로 향한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봄 햇살처럼 그렇게 따스하고, 손가락을 잘못 놀려 면도칼에 베었을 때 선홍빛 피가 흐르기도 전에 비명보다도 더 빨리 놀라는 그 순간처럼 강렬했다. 그녀의 첫사랑은. --- p.17

그의 이야기는 이랬다.
공수대원들이 지나가는 버스를 세우고 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끌어내렸다.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무자비하게 곤봉을 휘둘렀다. 그때 버스 안 뒷좌석에 앉아있던 체크남방을 입은 남자가 왜 학생들을 끌고 가냐며 항의를 했다. 그러자 공수대원이 남자를 버스에서 내리게 해 도로에 꿇어앉혔다.
버스를 보내고, 공수대원 한명이 다가가서 남자가 귀중한 물건처럼 품에 꼭 안고 있는 가방을 빼앗아 혹시 시위용품이 들어있을까 의심해서 바닥에 대고 흔들었다. 가방에서 아기용품들이 쏟아졌다. 그러자 남자가 흥분해서 벌떡 일어나 거칠게 대들었고, 공수대원 서너 명이 달려들어 개머리판으로 남자의 머리를 내리찍으며 폭행을 가했다. 남자가 피투성이가 된 채 축 늘어졌고, 공수대원이 남자를 군용트럭에 던져버렸다. 남자가 쓰러졌던 자리에는 아기용품들이 뒹굴었다. --- p.181

나는 다시 무덤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다가 어느 한 무덤 앞에 섰다. 묘비에 새겨져 있는 이름과 나이가 내가 찾는 그 아이의 것과 일치했다. 총격전이 벌어졌을 때 검정고무신을 집어 들다가 내 총을 맞고 죽은 아이였다. 나는 사죄했다. 아이의 아버지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사죄했다.
나는 1시간여정도 그 묘 앞에 앉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결심을 굳혀가는 시간이었다. 더 이상 주저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나는 택시를 타고 오면서 봐둔 그곳으로 갔다. 밑에서 올려다만 봐도 아찔한 절벽이었다.
나는 그곳으로 올라가 그 끝에 서서 눈 가는 데까지 멀리 바라보았다. 그 너머에, 5.18 너머에 찬란한 내 순수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국군의 날인 10월 1일에 시작한 내 삶의 여정이 1분도 안 되는 시간으로 축소돼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한 순간 이었다. 내가 여기서 몸을 날리면 그건 추락이 아니라 비상이라고 나는 믿었다. 새처럼 비상하고 싶었다. 살아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순수의 시절을 향해서. --- p.206

다음 날, 나는 어머니와 같이 YWCA강당으로 갔다. 200여명의 사람들이 좌석을 매웠다. 거의가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군데군데 어머니회의 동료들도 보였다.
이승호가 사회를 봤다. 그가 마이크를 잡고 재치 있는 입담으로 분위기를 잡은 후에 행사취지에 대해 설명하고 박수를 유도하면서 나를 소개하였다. 나는 일어나 단상으로 올라갔다. 근데 내 손에는 원고가 없었다. 그제야 알아차렸다. 내가 원고를 집에 두고 왔다는 것을. 나는 당황했다. 어머니가 그런 나를 바라보며 나보다 더 당황했다. 나는 그대로 서 있다가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미안합니다.
원고를 며칠 동안 준비했는데 집에 두고 왔습니다.
집에 어디다 뒀는지도 잊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이 웅성웅성 하면서도 나의 입을 주시하였다.
“제가 원고를 썼다는 것도 잊어버렸습니다.
여기 나와서 알았습니다.
근데, 이것도 내일이면 잊어버릴 것입니다.
저는 날마다 기억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일은 내일이면 잊어버립니다.
기억하지 못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쌓았던 지식도, 추억도, 사랑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 p.224~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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