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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3년 10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237쪽 | 265g | 128*188*20mm
ISBN13 9788954622721
ISBN10 8954622720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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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에는 유독 장마가 아주 늦게 찾아왔다. 그러나 무덥고 건조한 여름 내내 언제라도 폭풍우를 몰고올 것 같은 먹장구름이 낮은 지평선을 따라 층층이 짙은 어둠을 품은 채 들러붙어 있었다. 구름의 움직임 속에는 신묘한 비밀이 숨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매일 밤 그 먹장구름은 한낮의 길고 우울한 고요를 산산조각내버리고, 부드럽게 우르릉대는 천둥소리와 번쩍거리는 번개를 텅 빈 하늘 저 너머로 날려보내고 있었다. 끝내 그 구름은 비가 되어 내리지 않았다. 뒤로 밀려난 구름은 죄수처럼 펄펄 끓는 구름 전선 속에 갇혀 있는 듯했다.
--- p.9

번잡하고 소란스러운 삶의 고속도로에서 벗어난 그는 먼지가 풀풀 날리는 갈빛의 좁은 오솔길로 들어섰다. 그 길을 따라 핀 노란 데이지 꽃들이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바람을 벗삼아 춤을 추고 있었다. 데이지 꽃이 환하게 핀 오솔길을 보자 그의 마음속은 기쁨으로 차올랐다. 첫비가 내릴 때마다 그는 집으로 이어지는 그 오솔길에 노란 데이지 꽃을 심곤 했다.
--- p.13

백인들은 동양인들을 저급하고 더러운 족속들이라고 경멸했지만, 동양인들은 그나마 안도할 수가 있었다. 그들은 적어도 아프리카인들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백인들은 아프리카인들도 저급하고 더러운 족속이라고 했지만, 남부 아프리카 지역에 사는 아프리카인들은 안도할 수 있었다. 그들은 적어도 부시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족속 안에는 저마다 괴물이 있었다.
--- p.18

그후에도 딸랑거리는 깡통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 깡통 소리 때문에 소녀는 더욱 이성적으로 변해갔다. 누군가가 고함과 비명을 지르고 침을 뱉는다고 해도 소녀를 부시먼이 아닌 다른 존재로 바꿀 수는 없었다. 오직 한 가지 방법이 남았으니 지상의 어느 누구도 원하지 않는 부시먼이 대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그 이유를 찾아내는 일뿐이었다. 사람들은 부시먼을 바츠와나의 노예나 개 취급을 할 때를 빼고는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소녀는 그 숙제를 풀어야만 했다.
--- p.29

철저하게 홀로 남은 그는 가만히 손을 들어 가슴에 갖다대었다. 내가 대체 왜 이럴까? 그의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쾅’ 터지는 소리를 냈다. 바로 그 시간에 그와 똑같은 경험을 하고 있는 한 여자가 있었다. 그는 이전에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었다. 많은 여자 가운데 그나마 디켈레디 때문에 그것과 가장 비슷한 경험을 해보긴 했지만 이번은 좀 달랐다. 디켈레디는 단지 그의 피를 끓게 만들었을 뿐이다. 허벅지가 다 드러나는 치마를 입은 디켈레디를 보면서 그저 욕정이 끓어올랐을 뿐이다. 디켈레디와의 문제는 끓는 피, 단연코 그게 전부였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 일은 대체 어찌된 영문일까? 이번엔 마음속에서 금맥을 찾아낸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마음속에 늘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주목하지 않았던 금맥을 말이다.
--- pp.49~50

둘은 서로 다른 두 왕국을 다스리는 왕과 같았다. 몰레카의 왕국이 더 튼실해 보였다. 그의 왕국은 육중한 철문의 보호를 받고 있는 것 같았다. 마루의 왕국에는 그런 철문이 없었다. 마루는 아무 곳에서나 살았다. 그는 산문처럼 지루한 일상의 삶을 순식간에 하늘을 쏘는 별의 아름다움으로 바꿔놓을 줄 알았다.
--- p.53

그는 마음과 그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믿는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그것만이 진리이자 선을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었다. 그에게는 사적인 어떤 것도 개입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전 생애를 자기 마음속에 사는 신에게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그에게는 지적으로 성숙해가는 과정이었다. 그 과정에 감정이란 것은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었다. 그가 택한 방법은 아주 냉정한 것이었고 정확히 계산된 것이었으며 또한 정교한 것이었다.
--- pp.117~118

마거릿은 그녀의 머릿속을 채웠던 인상을 세 개의 장면으로 나누어 그렸다. 창가로 빛이 새어나오는 고독한 집 한 채를 따로 그렸고, 데이지 꽃밭을 따로 그렸다. 그리고 끝으로 낮게 깔린 하늘을 그렸다. 아울러 빛 한 줄기를 배경으로 거뭇한 두 형체가 포옹하며 서 있는 모습도 그렸다. 디켈레디는 포옹하고 있는 연인의 그림에 특별히 주목했다. 두 연인의 얼굴과 팔과 몸은 까만색으로 뒤덮여 있었지만 윤곽선만큼은 아주 뚜렷했다.
--- p.170

얼마나 보편적이냐 하는 것은 억압의 언어였다. 사람들은 백인들이 흑인들을 대하듯 마사르와를 대했다. ‘그 종자들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지. 아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말이야.’ 이것이 흑인을 대하는 전형적인 백인의 언어였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힘이 센 자들은 힘이 약한 자들을 붙잡아 곡마단에나 출연할 법한 동물로 만들었다.
--- p.178

바츠와나인들은 자기들이 백인들보다 안전하다고 믿었다. 백인들은 피억압 민중들이 격노하여 봉기라도 일으키는 날에는 지배자들을 갈기갈기 찢어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바츠와나인들은 속으로 백인들의 그런 공포를 비웃고 있었다. 그들은 백인들이 마사르와인들을 인간으로 인정하는 날이 결코 오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마루는 그림 속의 메시지가 마음속 깊이 사무쳤다. 그 그림들은 말하고 있었다. ‘자, 보다시피 이 나라에서 진정한 생명력을 지닌 자는 바로 나와 나의 부족들이오. 당신들은 생명력을 잃었소. 당신들이 우리에게 마루를 닦게 하고 당신들의 자식들과 가축들을 돌보라는 명령을 내린 순간부터 당신들의 생명력은 끝난 것이오. 지금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당신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이오. 그리하여 우리도 우리만의 문제를 고민하는 것이오.’
--- p.179

마루는 그가 꾸는 꿈과 계시를 사랑했다. 그 꿈과 계시를 통해 자신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가 함께 진보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의 꿈과 계시가 미치지 않는 곳은 없었다. 그것은 온갖 걸림돌과 금기를 넘어 불가능해 보이는 것조차 껴안았다. 그 꿈과 계시 속에 노예나 동정의 대상으로서의 인간 따위는 없었다.
--- p.180

마사르와 부족민들 또한 마루의 결혼 소식을 들었다. 자신들과 같은 부족 출신의 한 여자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이를 접한 부족민들은 말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비좁아터지고 어두컴컴한데다 공기조차 제대로 통하지 않던 방문, 그들의 영혼을 오래도록 가두어두었던 그 문을. 사해만방을 향해 내내 불어오던 자유의 바람이 마침내 그들의 방안으로 불어왔다. 그들은 신선하고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잠자고 있던 자신들의 인간성을 깨웠다.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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