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신을 인정해주며, 알아줄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이 중요하며, 인류의 일원으로 산다고 확신하게 되고, 의미 없는 세상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 p.27
무기력이 일으킬 수 있는 또 다른 결과는 약물중독이다. 자신이 무력하다는 확신은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 뿌리 깊게 배어 있으며, 약물중독 역시 이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젊은이의 중독은 폭력의 한 형태인데, 중독이란 중독자 자신의 의지를 어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것이 약물의 효과다. 약물중독자는 크고 작은 모든 범죄에 연루된다. --- p. 35
멜빌(Melville)이 〈빌리 버드(Billy Budd)〉에서 이미 암시한 것처럼 다른 순수도 있다. 빌리가 보여준 순수는 영성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현혹하는 것으로 이루어진 거짓순수(pseudoinnocence)다. 단순함을 이용하는 거짓순수는 성장을 경험하지 못한 아동기에서 나온다. 즉 과거에 고착된 상태다. 이러한 거짓순수는 ‘어린아이 같음’이라기보다는 ‘유치함’이다. 원자폭탄 투하와 같이 생각하기에 너무 크거나 무서운 문제를 직면하게 될 때, 우리는 이러한 거짓순수 속으로 움츠러든 채 무기력과 연약함, 무력함을 미덕으로 여긴다. 이 거짓순수는 유토피아주의에 빠지게 하므로 우리는 현실의 위험을 볼 필요가 없어진다. --- p. 55
마법에 의존하는 것은 흑인, 미국 원주민, 온갖 소수자에 대한 몇백 년에 걸친 억압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흑인은 수동적이고 온순하며 무력해질 수 있으며, 항상 위협하면서 때때로 폭력을 사용하면 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고 간주되었다. 하지만 이 거짓된 평온 가운데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었어야 할 “노예제도 아래서와 같이 한 개인이 사회적 또는 정신적으로 자신을 옹호할 수 없게 되는 때, 그의 권력은 어디로 간 것일까?” 하는 질문을 억제해왔다. 어느 누구도 죽기 전에는 완벽하게 무능력하다고 볼 수 없다. 사람이 분명하게 자신을 주장할 수 없다면 은밀하게 주장할 것이다. 은밀하고 신비한 힘인 마법은 무기력한 사람에게 꼭 필요하다. 마법이 확산되고 밀교에 의존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은 전환기에 널리 퍼진 무기력의 한 증상이다. --- pp. 116~117
또 다른 공격성이 있다. 바로 자기 안에 있는 공격성 또는 자신에 대한 공격성이다. 이른 아침 나는 이 책을 쓰려고 앉아 있다. 지금까지 긴장을 풀었고, 비교적 행복하며, 심지어 약간 평온하기까지 하다. 여기 앉아 공격성이라는 주제에 대해 생각하면, 무질서한 생각이 떠오른다. 어떤 통찰이 일어나든지 마음을 열고 그 주제를 심사숙고한다. 내 자신의 반항적 요소를 불러낸다. 창조력과 비전이 이런 싸움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면에서 ‘싸움’을 찾는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모든 공격성을 불러온다. 신화적으로 표현하자면 난쟁이와 요정, 그리고 트롤(스칸디나비아의 초기 민담에 나오는 거인)의 무리가 내 마음속에서 다투며 내 명령 따르기를 거부한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분명한 생각과 통찰이 나타날 때까지 일어나는 혼란은 실제로 사람의 삶과 문제를 새롭게 파악하기 위해 관습적 사고와 시선을 무너뜨리는 나 자신의 자기(self)다. 그것이 자신에 대한 공격성의 전부다. --- p. 189
폭력은 한 증상이다. 폭력이란 증상을 낳는 그 질병은 무기력, 무의미, 불의같이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간단히 말해서, 그 질병은 내가 인간이 아니며 세상에는 내 집이 없다는 확신이다. 나는 폭력도 그것을 촉발할 어떤 징후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면서 폭력을 낳는 그 질병을 간단하게 무능력(impotence)이라고 불러왔다. 이 무능력은 자신이 고통당하거나 죽으면 상황이 나아지리라는 희망과 결합된 절망이다. --- p.296
사춘기 자녀의 반항적인 태도를 기뻐할 부모는 없다. 하지만 이 반항적 태도 속에 들어 있는 자기주장과 공격성이 자녀가 성인이 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임을 안다면, 이 문제를 대하는 부모들의 태도도 바뀔 것이다. 입시 경쟁 속에서 자기를 긍정하고 주장하며 건강하게 공격성을 발휘할 기회를 박탈당한 청소년들은 병든 폭력성으로라도 자신을 긍정하고자 할 것이다. 우리 자녀가 책임감 있는 성인이 되기를 바란다면 그들 안에 있는 권력을 인정해주고, 그에 따른 책임도 지는 것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책임은 권력에 비례한다.
오늘도 우리는 순수를 원하지만, 인간에게 순수한 선이나 순수한 악은 없다. 누구나 ‘용과 스핑크스’를 내면에 지니고 다닌다. 용과 스핑크스는 우리 자신과 세계 안에 있는 악이다. 문제는 용과 스핑크스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그들을 다른 사람에게 투사해서 악마적인 폭력성을 발휘하느냐, 아니면 직면하고 통합해서 건강하게 나를 주장하고 소통의 길로 나가느냐 하는 선택이다. 저자의 말대로 “산다는 것은 악이 공존하는 속에서도 선을 이루는 것이다.” 선과 악이 뒤섞인 삶 속에서, 자신 안에 있는 악과 선을 모두 인정하면서, 나와 마찬가지로 허물 있는 다른 사람들을 공감하고 용서하게 될 때, 우리는 공격성과 폭력을 소통의 힘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옮긴이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