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갓집은 여자 형제가 많은 집 특유의 흥겨움이 있었는데, 나는 박남정을 활용해 그 분위기에 적극적으로 편승해보기로 했다. 〈널 그리며〉에 맞춰 그간 갈고닦아온 기역니은춤을 열심히 추었다. 엄마가 보낸 속셈 학원에서 속셈 대신 배운 춤이다. 내 춤을 본 큰외삼촌과 막내 이모부가 나의 속셈대로 껄껄 웃으며 1,000원, 2,000원 용돈을 더 주었다. 춤을 멈추면 더 춰보라 채근하며 3,000원, 5,000원도 주었다. 레퍼토리가 떨어지면 개다리춤도 추고 엉덩이도 실룩거리고 기역니은춤을 변형해 목욕하듯 손바닥으로 가슴과 배를 쓸었다. 아, 이거 통하는구나. 기뻤다. 이게 다 한국의 마이클 잭슨, 박남정 덕분이다.
--- 「천재 단신 댄스 가수를 그리며」 중에서
2016년 ‘입덕’ 이후 지난 5년 동안 오마이걸에 많은 걸 빚졌다. 야근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경의선에서 그들의 음악을 무한 재생했다. 야당역에 내려 행인 없는 육교를 건너면서는 열띤 목소리로 흥얼거리기도 했다. 그러면 하루 스트레스가 제법 사라졌다. 운전할 때에도 오마이걸을 들었다. 몽환적인 노래를 듣고 있으니, 끼어드는 차가 있어도 욕이 나오지 않았다. 오마이걸이 활동하는 몇 달은 삶을 버텨내기 쉬웠다. 많은 계절과 밤낮을 오마이걸 덕분에 한결 수월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저 잘 지냈다. 그래서 그저 고맙다. 내가 이렇게 고마울 일이 많다. 내가 정말 감사하다. 내가 이렇게 사랑한다. 그래서인지 미안하다. 갑자기 물보라 같은 눈물이 난다, 다, 다, 다, 다다다다다다. 뿅!
--- 「찾았다, 오마이걸!」 중에서
이달의 소녀는 월간 학습지나 구몬 선생님과는 달랐다. 어머니는 말씀하셨지. 공부를 그렇게 해봐라. 이달의 소녀와 친숙해지기 위해서는 약간의 공부가 필요했다. 이름을 외우고 콘셉트를 익히고, 거기에 익숙해지기까지 좀 피곤할 수도 있는데… 그럴 겨를도 없이 그들은 너무나 훌륭한 결과물을 내놓는다. 〈So What〉과 〈Why Not?〉에 이르기까지 앞선 역사를 알아야 현재의 성과가 더 잘 보인다. 콘셉트와 변화와 방향성을 가늠하면 이 콘텐츠를 더 즐겁게 만끽할 수 있다. 이달의 소녀는 공부를 필요로 한다. 어머니가 바라던 공부는 아니었을지라도.
--- 「타세요, 루나버스」 중에서
DJ는 그 노래를 넘겨버리고, 〈교실 이데아〉를 틀었다. 오래 엎드려 있으니 머리에 피가 몰렸다. 지금 나오는 노래를 거꾸로 틀면 “피가 모자라”라는 소리가 들린다는 소문이 있었다. 악마 숭배자라는 의심을 받는 이의 명곡이 시작되었다. 아마도 마지막 노래일 테니 우리들의 추억 아니, 깍지도 끝이 보이는 셈이다. 단체 기합을 받는 까까머리 중학생들의 낑낑거리는 신음 사이에서 크래쉬의 목소리가 웅장하게 지면을 두드렸다. 그러게, 왜 바꾸지도 않고 이렇게 엎드려 있는 걸까? 뭘 바꾸지 못해서 우리가 이러고 있는 걸까?
--- 「됐어」 중에서
호르몬의 문제일까. 종종 뜬금없이 운다. 오늘 아침에는 아이유의 노래를 들으며 울었다. 미니 앨범 《Love Poem》의 리스트는 복되고 영롱했다. 특히 〈시간의 바깥〉은 눈물이 나도록 좋았다. 이런 문장은 보통 은유법이거나 과장에 불과해야 맞을 텐데, 운전대를 잡은 채로 충혈되는 눈을 내버려둔 것이다. 이유 없이 울고 싶은 날도 있지. 그날이 오늘이라고 이상할 일은 아니겠지. 오늘 같은 날이 매일이라 해도 삶은 어색할 일 없다. 사는 일은 우는 일에 가깝다. 달라질 건 없다. 슬픔은 다시 차오르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울지 않는다면, 오늘과 다를 것 없을 내일을 맞이할 용기를 얻기 힘들 것이다. 울지 않는다면, 차오르는 슬픔을 덜어낼 방법이 없을 것이다. 울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무도, 울지 않는다면.
--- 「시간의 바깥에서 만나」 중에서
공개방송은 물론 친구의 제안으로 가게 된 것이었다. S.E.S.의 무대 뒤로는 R.ef와 솔리드의 무대가 남아 있었는데, 친구들의 진심은 가차 없었다. 남은 공연을 뒤로하고 체육관에 차가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통로로 먼저 나갔다. 거기엔 우리 같은 녀석들이 발을 동동대고 있었다. 가수들을 보았다는 열기를 겨울의 한기가 서서히 잠식해갈 때, S.E.S.가 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차량이 나타났다. 검은색 승용차였다. 나는 그게 S.E.S.인지도 잘 모르겠건만, 눈썰미 좋은 친구가 분명하다며 먼저 달리기 시작했다.
--- 「여전히 뛰고 있는지」 중에서
우리에게는 김완선에서부터 시작된 여성 퍼포먼스형 아티스트의 도저한 역사가 있다. 사람들은 섹시함이니 청순함이니 하는 것들로 그들을 정의 내리려 하였으나, 오래 살아남은 아티스트들은 쉬이 범주화할 수 없는, 그저 ‘멋짐’과 ‘훌륭함’의 영역에 있었고, 그 영역을 확장해왔다. 보아가 그랬고 이효리가 그랬으며 최근의 선미와 현아가 그러하며 청하 또한 오래도록 그러할 것이다. 청하가 이어갈 역사를 의심할 필요는 단연코 없다.
--- 「청하의 선언」 중에서
B는 강다니엘의 팬이었다. B는 강다니엘의 매력을 설명하는 데 긴 시간을 투자하지는 않았다. 그런 정도는 너도 알고 있지 않냐는 식이었다. 그래 매력 있긴 하더라만, 그렇다고 내가 투표까지 할 일은 아니지 않나? B는 그간의 우정과 신뢰를 바탕으로 그저 한 표를 달라고 했다. 어찌 보면 막무가내인데 묘한 박력이 나를 설득했다. 생방송 때 한 표를 주면 밥을 살 것이라 했고, 그날의 음료와 케이크를 샀으며, 약속을 상기시키는 메시지를 보내면서 커피 기프티콘까지 보냈다. 아니 어차피 강다니엘이 우승할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절실하지? 뭐가 사람들을 이렇게 절실하게 만드는 거야? --- 「우리가 열렬히 사랑했던 시절」 중에서
이제는 명절에 목포 아파트 현관에 들어서면 마치 우연인 듯 송가인이 텔레비전에 나와 노래를 하고 있고, 이게 무엇이냐 물으면 당당하게 유튜브라고 답하신다. 정치 이야기를 시작하면 그때부터 만사가 복잡해지지만, 노래 이야기를 하면 모든 것이 쉽사리 해결된다. 역시 노래를 잘하는군요. 그렇지. 역시 송가인이네. 그렇고말고. 송가인은 뭔가 다르긴 다르네. 역시 뭘 좀 아네. 덕담이 오고 가는 명절이 되어버린다. 트로트가 일으킨 일대 변화다. 송가인이 만든 혁신이다.
--- 「뱃사공들」 중에서
역마다 어울리는 노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설명하기 어렵다. 취향이란 원래 그 기원을 알 수가 없는 법이다. 취향은 당사자의 설명이 불가능하고, 해명이 요구될 수도 없다. 취향의 묶음을 업계 관계자가 발견하거나, 취향의 갈래를 비평가가 분석할 수는 있겠지만. 날마다 전철에 올라타는 우리에게 그럴 시간은 없다.
--- 「그 역에서 들어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