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코끼리(맘모스)가 지나는 길목에 큰 구덩이를 판다. 그리고 대나무들을 뾰족하게 갈아 끝이 위로 가도록 구덩이 안에 박는다. 그러고는 잠복해 있다가 털코끼리가 나타나면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뛰어나가 불망치로 위협해 털코끼를 구덩이 쪽으로 몬다. 구덩이로 떨어진 털코끼리는 인간들의 돌벼락과 곤봉.투창 세례를 받고는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다. 인간의 무자비함과 지략은 구석기 시대에도 이 경지에까지 올라 있었다.
(그림 설명문) 사냥에 성공하면 사람들은 사냥감을 그 자리에서 먹어치는 것이 아니라 무리들이 기다리는 동굴로 운반해 간다. 거대한 쌍코뿔소는 들 수 있을 만한 크리로 분해된다. 만약 한두 명이 운좋게 이 쌍코뿔소를 차지했다면 그들이 가지고 갈 수 있는 양만 챙겨 가고 나머지는 수풀 속에 숨겨 두었다 동료들을 불러와서 운반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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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측정법의 차이에서도 드러났지만 현재 전곡리 구석기 유적에 관한 학계의 쟁점은 그 시기에 초점이 모아져 있다. 한쪽에서는 20만 년 전의 전기 구석기 시대로 보는 데 비해 다른 한쪽에서는 4만~5만 년 전의 후기 구석기 시대로 본다. ......비록 중요한 쟁점이 남아 있지만 40년도 채 안 된 한국의 구석기 연구사에서 전곡리 유적 발굴이 갖는 중요성은 매우 크다. 공주 석장리 등 다른 곳의 구석기 유적과 더불어 이곳에 관한 연구가 더욱 진전되어 한반도 선사시대의 면모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기를 기대한다.
--- p.77
손이 하는 일이 이처럼 많아지면서 그 손을 지시하는 인간의 두뇌도 점점 복잡하게 변화해갔다. 이 변화야말로 인간을 다른 동물로부터 결정적으로 멀어지게 만든 경이로운 계기였다. 수백 년에 걸쳐 전개된 사냥과 채집 생활. 그것은 고단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생활 방식이었으나, 독수리에 채이고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던 자연의 약자를 경이적인 지구의 왕자로 변모시킨 더디지만 되돌려 놓을 수 없는 거대한 혁명의 전주곡이었다.
우리는 오늘도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고, 무언가를 고르며, 무언가를 잡고서 살아간다. 무엇이든 그 속에 한번 들어가기만 하면 이전에 없던 새로운 창조물이 되어 나오거나 철저하게 짓이겨져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이 세계가 낳은 가장 창조적이고 탐욕스러운 우리의 '두 손'을 위해 경배를!
--- p.13-15
반구대 바위그림이 언제 그려진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 걸작이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이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에 의해 대를 이어 창작된 것은 분명하다. 이 사람들이 고래에 대해 대단히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고래 사냥이 그들의 주된 생업이었다는 것도 분명하다. 고래 사냥은 여름에 제철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원전 어느 하지 날로 돌아가 고래 그림이 선명하게 새겨진 바구대 앞에 모여든 이 마을 사람들을 만나 보기로 하자.
반구대는 북향이기 때문에 하지 같은 여름날 아침이 아니면 쉽게 햇볕을 받을 수 없는 곳이다. 그러니까 당시 화가들은 어두운 바위 면에 달라붙어 오늘처럼 해가 비칠 때를 기다리며 작업을 해왔을 것이다. 반구대 바위그림은 페인트로 칠하는 그림이 아니라 날카로운 도구로 바위면을 긁어서 새기는 일종의 '부조'이다. 더구나 오른편에 보이는 그림들은 돌칼로 선을 그어 형체를 만들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판화처럼 형체에 해당하는 부분을 끌 같은 것으로 파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바위그림의 높이가 3M가까이 되니까 맨 위에 새겨진 '춤추는 샤먼'같은 그림은 틀림없이 사다리까지 동원해야 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그림들은 상당한 재주를 가진 그림꾼들이 조직적으로 달려들지 않고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작품이었다.
무엇을 위해 그 힘든 작업을 했을까? 그림을 보면 이 마을 사람들은 여름에는 주로 고래 사냥을 하고 살았던 게 틀림없다. 공동체의 성격상 바위그림을 그리는 작업은 마을 사람들 모두의 성원 속에 그들의 염원을 담는 일이었을 것이고, 그 염원이란 고래 사냥의 풍요로운 수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치 제막식이라도 하듯 어둠에 가려 있던 바위그림에 햇빛이 비치는 하지가 돌아오면 그 그림 앞에 모여 풍어제를 지냈을 것이다. 그림을 보고 한 번 상상해 보자.
반구대 앞 강바닥에는 해뜨기 전부터 수십 명의 마을 사람들이 모여든다. 절벽 아래 제단처럼 생긴 바위 턱에 서 있던 제사장이 춤을 추면서 바위그림을 향해 풍요로운 수확을 기원한다. 그러고 나서 준비된 음식을 나눠 먹고 한바탕 춤판을 벌인 뒤 모두들 고래잡이 배에 오른다. 한편 이렇게 그려진 바위그림은 새로 자라나는 세대에게 고래에 관한 지식과 고래 잡는 기술을 교육하는 교재로도 톡톡히 역할했을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뒤에는 먼 조상과 후손들을 정신적으로 연결해 주는 가교 역할을 하면서 끊임없이 재창작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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