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다 읽고 나면? 한 사람의 독자로서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갈, ‘오늘을 사는 순례자’로서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어집니다. ‘최선을 다해 오늘을 기쁘게 살 준비가 되어 있는가?’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덕을 닦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마침내 잘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무엇보다 현재를 충만하게 살아가는 지혜로움과 욕심을 버린 청정함을 새롭게 간구하며 나는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이 책의 일독을 꼭 권하고 싶습니다. --- 추천의 글 중에서
필자는 이 책에 제시된 인물들만이 우리에게 삶과 죽음에 대해 가치 있는 무언가를 가르쳐 줄 수 있다고 피력하고 싶지는 않다. 훌륭한 스승들은 세상 도처에 있고, 그들 중 대부분은 역사책에 등장하지 않는 ‘보통’ 사람들이다. 마찬가지로 필자는 이 책이 다루는 일곱 덕목만이 긍정적인 인격적 특성들의 범위 전체를 포괄한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다. 하지만 필자의 견해로 이 일곱 덕목은 착한 삶에 이어진 착한 죽음을 위해 절대적으로 불가결한 것들이다. 이 덕목들 중에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다면 우리가 잘 살고 잘 죽을 수 있는 가능성은 현저히 낮아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이면, 한 가지 덕목만을 기른다고 해서 잘 살고 잘 죽는 법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장에서 살펴보겠지만 덕목들은 필연적으로 상호 연관되어 있다. 여기에 제시된 인물들은 사실 저마다 일곱(심지어 더 많은) 덕목을 모두 기르고 실천해 왔다. 필자는 다만 각 개별 인물을 주의 깊게 살펴볼 때 한 특정한 덕목이 더욱 부각되어 나타난다는 점을 피력하고자 했다. --- 서문 중에서
아무리 철저한 회심이라 해도 평생 길러 온 습관들을 하룻밤 사이에 바꾸기란 아주 어렵다. 버나딘 주교 역시 회심 후로도 자신의 집착을 놓아주고 다른 이들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둘 수 있을 만큼 온전히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 맡기는 데 힘겨워했다. 그는 중년기에 기록한 영적 일기에서 자주 이러한 투쟁에 대해 써 내려갔다. “나는 주님께서 들어오시게 문을 열어 그분께서 내 영혼을 온전히 차지하시기를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렇게 고백하기도 했다. “나는 좀처럼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어느 정도만 그분이 내 안으로 들어오시게 허용한다. 그분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그분께서 나를 차지하실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 ……
버나딘 추기경은 몰려오는 두려움과 회의감을 억압하지도 않았고 그 감정들에 휩쓸리지도 않았다. 한밤중에 파고드는 두려움과 이따금 찾아오는 회의감에도 불구하고, 그는 믿음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하느님께 믿음을 두었고, 그러한 믿음에 힘입어 하느님께서는 위대한 해결사가 아니시더라도, 로완 윌리엄스가 말한 대로 어떤 상황에서도 새로운 가능성들을 불어넣어 주시는 분이라는 확신을 갖고 살 수 있었다. 버나딘 추기경은 이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믿음은 “(치유와 같은) 무언가가 일어나리라고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믿음은 “하느님의 사랑 어린 보살핌 속에 살고자 하는 자세이다. …… 믿음은 어떠한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더라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 사랑받는 존재임을 알게 함으로써 우리를 위로해 준다.”고 했다. --- 믿음·조셉 버다닌 중에서
테아 수녀가 우리에게 물려준 위대한 가르침이자 경고는 비록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능력을 심어 주셨지만, 훈련과 길들임 없이는 우리가 사랑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랑은 숨 쉬는 것처럼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온전히 다가가는 방식으로 다른 이들과 ‘동반’하려는 열망은 진지한 자기 성찰과 건강한 자존감의 함양을 수반해야 한다. 또 그것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맞춰 주어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는 것, 사랑하는 이의 상황으로 들어가려는 의지,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사랑하는 이의 행복을 위하는 헌신이 요구된다. 이러한 것들은 의식적이고도 체계적으로 길러야 할 사랑의 자질들이다. 특히 실천하는 사랑은 때때로 혹독하고 두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나는 게 죽음이 아니다. 오히려 죽음은 진정한 인간관계가 결핍된 채로 근심과 침묵과 외로움으로 가득 차 있는 무의미하고 공허한 존재 상태를 의미한다.” 만약 테아 수녀가 이 말을 들었더라면 당장에 진심 어린 “아멘!”을 외치며 호응해 주었을 것이다. --- 사랑·테아 보우만 중에서
생애의 최후 몇 달 동안 존재의 아름다움에 대한 에티의 감사 표현은 그녀의 일기와 편지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1942년 6월, 그녀의 첫 번째 베스테르보르크 체류 중에 그녀는 수용소 체험에도 불구하고 삶이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진 선물이라는 이전의 확신이 시들지 않았음에 놀라워하며 감사의 표현을 적었다. 또한 무사히 암스테르담에 돌아와서는 이렇게 적었다. “이전에 나는 내 책상 위에 놓인 책들과 시집들과 꽃들에 둘러싸인 내 삶을 사랑했다. 그런데 어느덧 추궁과 탄압을 받는 사람들로 꽉 찬 막사들 사이에서 나는 삶에 대한 나의 사랑을 재확인했다.” 이러한 재확인은 그녀에게 너무도 중요했기에, 어느 순간 그녀는 “나를 평화로운 책상에서 끌어내어 이 시대의 근심과 고통 한가운데에 있게 해 주셨음”에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해서 에티가 자기 주변의 고통을 경시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녀는 공포 한가운데서도 삶의 깊은 선성을 의식했을 따름이다. 나이를 막론하고 무서워 떠는 수감자들의 얼굴들을 바라보는 중에도 에티는 하느님의 현존을 느꼈다. 가시 돋친 철조망 너머 하늘을 올려다보면서도 그녀는 하느님의 현존을 느꼈다. “저 너머 온통 잿빛 하늘을 가르며 나는 갈매기들이 보인다. 그들처럼 내 안의 사고들은 자유롭게 날고 있다.”--- 감사·에티 힐레숨 중에서
분명 우리 대부분은 순교자로서 죽음을 맞이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반드시 죽을 것이고, 죽음은 우리가 부름 받아 향해 가는 영적 여정의 필수 경유지이다. 또 죽음은 우리가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이고, 말하자면 우리가 순명해야 할 명령이다. 어떻게 죽음에 순명하는지는 우리가 평생 마음의 습관으로서 순명을 얼마나 잘 함양했는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불가항력에 완고하게 저항하며, 순순히 어둔 밤에 들어서기를 거부할 수도 있다. 이와 반대로 우리는 죽음의 의미를 듣고서, 진정 귀 기울여 듣고서 죽음을 하느님의 마지막 부르심이자 우리 여정의 최종 본향을 향한 교차로로 깨달으며, 부활과 이어지는 하나의 십자가로서 죽음을 껴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죽을 운명 앞에서 그저 수동적인 운명론을 함양하라는 말은 아니다. 더구나 유쾌하게 맞이할 일이거나 학수고대할 사건인 양 죽음을 비현실적으로 바라보라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죽음에 수반된 슬픔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하나의 엄연한 부르심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부르심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분명 알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힘이 되는 바람이 우리 뒤에서 불어오리라는 것이다. --- 순명·조나단 다니엘스 중에서
1945년 4월 9일에 있었던 디트리히 본회퍼의 사형 집행을 목격한 군의관은 자신이 지켜본 그 당시의 장면을 결코 잊지 못했다. 당일 아침, 전원 히틀러 암살 모의에 가담한 죄로 복역 중이던 본회퍼와 5명의 동료 수인들은 플로센부르크 포로 수용소 독방에서 끌려나왔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자신들이 국가 반역죄로 몇 시간 내에 교수형에 처해지리라는 짤막한 통보를 전해 받았다. 얼마 후 그들은 옷이 벗겨진 채 알몸으로 처형 장소로 인도되었다. 올가미가 그의 목에 걸쳐질 때 본회퍼는 고요해 보였다. 군의관은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이 사랑스러운 남자의 기도하는 모습에 아주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는 매우 경건해 보였고, 하느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실 거라는 확신으로 가득 차 보였다. …… 그는 용감하고 차분하게 교수대 발판을 딛고 올라갔다. …… 나는 일찍이 그렇게 온전히 하느님 뜻에 자신을 내맡기며 죽어 간 사람을 본 적이 없다.” --- 용기·디트리히 본회퍼 중에서
고통은 다른 이들에게 유익한 표본이 될 때 의미를 부여받는다. 고통, 특히 죽음에 앞선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은 극히 드물다. 적지 않은 경우 우리는 우리 자신이 겪을 고통을 미리 내다보는 것이나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 곁에 있기를 꺼려 한다. 이처럼 고통에 대한 생각 자체나 고통의 현실을 회피하려 애쓰는 것이 우리 대부분의 모습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산 표양이 되어 큰 고통이나 불행에 맞서 인내를 보여 주는 것은 하나의 탁월한 가르침으로 전해진다. 그러한 표양을 통해 우리는 고통이 반드시 우리에게서 자유나 위엄을 빼앗아 가지는 않음을 보게 되고, 더 나아가 우리에게도 닥칠지 모를 고통에 대처할 힘을 얻게 한다. 더욱이 이제 우리 편에서 다른 이들에게 유익한 표양이 되고자 감화를 얻기도 한다. 특히 삶의 마지막에 가서 우리의 고통을 인내롭게 껴안는 모습은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남겨 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선물들 중의 하나임이 틀림없다. --- 인내·요한 바오로 2세 중에서
그리스도 닮기의 덕을 실천해 나가는 것은 우리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영적 근시안을 교정해 주고, 우리가 세상을 그리스도로 충만한 세계로 볼 수 있도록 이끌어 주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리스도 닮기의 덕을 통해 우리는 용기와 믿음과 사랑으로 우리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
카릴의 신념대로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하는 또 다른 그리스도들이라면, 우리는 그분의 고통과 죽음에도 동참해야 한다. 하지만 신비체의 지체라면 어느 누구도 영구히 죽지 않는다. 부활이 죽음에 뒤따르는 것은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이에 대해 카릴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모두 한 그리스도인이 죽을 때, 죽는 분은 그리스도이시고, 결국 그분은 사랑으로 죽음을 물리친 분이심을 알고 있다.”
우리가 사는 동안 모든 것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되었다면, 어찌 죽는 순간에도 그분의 현존을 알아보지 못하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죽음의 독침이 해소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그리스도께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셨다. 하지만 그리스도 닮기의 덕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끝이 아니었듯이, 우리의 죽음 역시 끝이 아님을 깊고 항구하게 믿게 된다. --- 그리스도 닮기·하우슬랜더 중에서
우리가 알게 모르게, 생명과 죽음은 우리가 인생의 여정을 지속해 나가는 동안 언제나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또한 이 두 가지는 우리에게 현실 아니면 부정, 믿음 아니면 불신, 사랑 아니면 이기심, 순명 아니면 완고함, 용기 아니면 비겁함, 인내 아니면 불안, 그리스도 닮기 아니면 불감증, 이런 일련의 대립 명제들 중에서 양자택일하라고 요청한다. 이에 대해 우리가 내리는 매번의 선택과 결정은 매우 중요하다. 집회서가 우리에게 말해 주듯, 우리의 존재는 우리가 선택하는 것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선택들은 우리 삶의 질을 좌우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한 번 가면 발걸음을 물릴 수 없는 곳으로 향해 가는 황혼 길에서 결국 우리의 행동 방식을 규정하게 될 것이다.
--- 결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