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모두가 행복시대로 가는 길은 없는가 하는 고민을 해 볼 필요가 있다. 그 해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행복사회와 불행사회로 둘로 나뉘어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접점에서 제휴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즉 좋은 조건이 적절하게 분배되어 행복을 낳고 동시에 나쁜 조건이 적절하게 분배되어 불행을 극복할 수 있는 사회가 행복사회라고 할 수 있다. 등수에서 밀려났다고 해서 영원히 밀리는 사회가 아니라 만회의 기회가 있고, 또한 만회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등수에서도 그 위치에서도 그 자리에서도 희망을 찾아 행복해 질 수 있는 사회가 행복사회이다.--- pp.25-26
그러나 정의나 불의의 판단은 강한 자가 하고, 개인보다는 공동체가 하며, 패자보다는 승자가 하고 있다. 따라서 약한 자, 개인, 패자 등은 그에 따르거나 준수할 수밖에 없는 구조에 매여 있다. 그렇게 정의에 붙어 기생하는 불의가 실현되는 사회, 공동체의 명분에 붙어 기생하는 집단엘리트가 행복을 챙기는 사회, 정의의 이름으로 실현되는 불의사회, 강자가 약자를 통해서 행복을 얻는 사회를 정면에서 거부하고 극복해야 정의사회를 구현하는 것이며, 정의적 책임을 지는 것이며, 행복정의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내놓는 것이다.--- p.159
혼돈과 방황이 앞을 가리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지식과 지식인이 앞서는 것이 아니라 눌리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좌절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행복시대로 가야만 살아날 수 있는 다음 세대가 있기 때문이다. 다음 세대에게 좋은 모습으로 세상을 돌려 줘야 하며, 또한 그것을 위해 지식을 찾아 책임을 지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지식인을 가짜지식으로 내몰거나 겁박하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지식의 끝을 불의를 향해 조준하며 힘겹게 싸워가는 지식인이 있다. 그들을 따라하는 데, 흉내를 내는 데 시간이 걸릴 수도 있지만 한 발이라도 내딛어야 한다.--- p.176
그러나 나는 공동체에서 하고 싶은 활동에 빠지고 싶은 열정은 넘쳐나지만 그곳으로부터 기쁨을 찾는 데는 여전히 미숙하다. 만약 눈에서 발사되는 빛이 어딘가에 부딪혀 머무는 곳에서, 마음에서 토해내는 진한 사랑이 물드는 곳에서, 몹시도 안달하는 조급함과 그리움이 앉은 곳에서, 열정이 숨 막혀 식어가는 곳에서, 아무도 마음 주지 않는 추한 곳에서, 흔적 없이 홀로 채워가야 하는 빈 공간에서, 가장 낮은 곳에서 기쁨을 찾아야 한다면, 나는 당당하게 나설 것이다.--- p.249
그와 더불어 개인 이외의 존재는 푸어신드롬을 오히려 강화하거나 적정 수준이라고 생각하는 선에서 조정만 하고 있는 것 같다. 푸어가 죽지 않을 정도로만 말이다. 왜냐하면, 푸어층이 있어야 리치층이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푸어신드롬이 제거되지 못하고 재생산되는 이유이다. 이런 이유에서 한국사회에서 푸어층을 이루고 있는 개인들은 푸어신드롬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일확천금이나 교육을 선택하고 있다.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교육은 문명푸어족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마법으로 통하고 있는 것이다.--- p.263
한국사회에서 문명화의 진도나 속도에 발맞추는 과정에서 생긴 문명증후군을 앓고 있는 문명푸어족은 그것을 감당하는 데 한계가 오고 있다. 문명푸어족으로 전락한 개인이나 가정은 살려달라고, 목숨을 구해달라고 울부짖고 있다. 다양한 발전과 희망을 갖게 해달라는 미래형의 요구가 아니라 밀어닥친 위기와 신음하고 있는 아픔을 치유해달라는 현재형의 구제요구이다. 그런 구제는 문명화로 인하여 발생한 문명증후군을 힐링하는 것을 의미하고, 가정, 개인, 기업, 사회, 국가 등이 문명푸어가 되는 것을 막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은 푸어가 되길 과감하게 결단했던 개인이나 가정을 위해 국가, 기업, 사회가 보상을 해야 하고 그들을 만찬의 귀빈으로 초대해야 할 때이다. 문명이 아름다운 결과를 계속적으로 맺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문명푸어가 자랑스러운 훈장이 되는 행복시대를 열기 위해서 국가, 기업, 사회가 희생할 때가 온 것이다.
--- p.2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