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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시를 읽는 오후 네 시(애지시선 95)(양장본 Hard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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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시를 읽는 오후 네 시(애지시선 95)(양장본 HardCover)

최은별 | 애지 | 2021년 03월 19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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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3월 19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140쪽 | 250g | 127*194*12mm
ISBN13 9788992219969
ISBN10 8992219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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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A 자 모양의 빨래 건조대에 늙은 시집 한 권이
널려 있다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느라 읽던 책을 잠시 걸쳐 놓고 있었다
초콜릿 맛 아이스크림 한 통을 퍼먹으며 사이사이 책을 몇 번
노려본다 그때마다 책에서 오래된 초콜릿 맛이 난다

시집은 건조대 위에서 빨랫감의 기분에 대해 생각한다
볕도 없고 비만 내리지만 시집은 실제 빨랫감이 아니라
별로 상관없다 시, 와 비, 는 비슷한 글자이니 더더욱 괜찮을지 모른다

시집은 한 번 읽힌 뒤 쭉 책장에서 노쇠해져 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잊히는 운명을 맞이할 참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다시 선택된 것도, 지금 건조대 위에 널려 있는 상황도 다 꿈같고
몇 번씩 입혀지고, 세탁되는 빨랫감의 기분을 알 리도 없다고 판정한다

시집이니까, 시옷 자로 펼쳐 머리에 써 본다 내가 시가 된 것 같다
모자가 된 시집 역시 나를 감싸 주고 감춰 주니 비로소 집이 된다
이제야 시집다워지고
이제야 빨랫감의 기분을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책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여전히 시옷 자 모양으로
다른 늙은 시집 한 권을 더 꺼내 똑같이 펼친 뒤
나란히 붙여 주니 둘은 웃는 얼굴이 된다

그사이 나는 초콜릿 아이스크림 한 통을 다 먹었고
늙은 시집과 다른 늙은 시집에서도 오래된 초콜릿 맛이 났다

--- 「빨랫감」



멀리 푸른 산들이 여러 겹으로 겹쳐 있었다
눈앞의 수면에는 빛살이 가득 늘어박혀 있었다
부허한 마음을 수습하기에 좋은 풍경이었다
좋은 날이었다

문득, 당신이 내 안에 숨어들어 일으킨
파문을 형상화하고 싶었다

내가 고개를 돌린 뒤에야 닿곤 하는 늦은 눈동자
살금살금 다가와 어깨를 토옥 건드리는 여린 손길
정적 속 스스럽게 한번 터는 마른기침, 같은

나는 가장 반질반질 윤이 나는 돌멩이를 찾았다
짝짝이 신발 중 거추장스운 쪽을 벗어 던지고
앙감질로 힘차게 뛰었다
돌멩이는 선연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
수면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그것은 아주 조심스러웠고
눈이 부셨다

--- 「파문」



플플랫폼에서 어름거리며 우는 사람을 보았다
네가 생각났다
(누가 울면 따라 우는 너는 늘 시인 같았다)

기차 안에서 다리 떠는 사람을 셋이나 보았다
그들은 믿지 않을 테니 상관없고
내 복만 달아나는 기분
(세상의 모든 속설을 믿는 너는 늘 시인 같았다)

좌석에 앉아 편지 봉투를
뜯는다, 마침내

수취인 란에 너는 또 내 이름을 멋대로 지어 썼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
시와 가장 비슷한 일이다
(이름 짓기가 취미인 너는 늘 시인 같았다)

너와 반짝이는 장면을 공유하며 명명하고 싶을 때마다
이미 네가 그것에 붙인 이름이 있어
나는 함부로 시인이 될 수 없었다

너는 이채롭고 극렬하며 무해한 말들만 하는 사람
어떤 언어들은 그 자체로 시 같아서
너는 시를 쓴 적 없어도 항상 시인이었다

오래전 네가 쓴 편지를
읽는다, 마침내

( )랑 0이 너무 닮아서 몇 번 잘못 읽었다
( )나 0이나 없는 셈 칠 수 있는 거니까 착각해도 별 문제는 없었다
아니, 그러나 분명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지
그게 없으면 제대로 설명이 안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너를 자주 오독했다

내가 열린 ( )이고 네가 최초의 0이라면
내가 너를 학습해도 될까
너의 모든 걸 표절해도 될까
기침이나 한숨이나 그림자나 발자국이 되어도 될까

숨 없는 너를 만나러 가는 길
창밖의 세상은 울렁거렸고
씀벅이는 눈으로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니 오후
네 시였다

(네가 울까 봐)
울지는 않았다

--- 「네 시를 읽는 오후 네 시」



벌거벗은 새들의 입속으로
벌거벗은 새들의 입속으로
일제히 달려드는 빗방울

믿지 말아야지
갑작스런 비를 믿지?말아야지
나를 흐트러뜨리고 어찌해야 할지 당황시키는
비를 믿지 말아야지

비밀을 구걸하지 않는 새들의
단단하고 선명한 노래처럼

외쳐야지, 우기를 거두고
행여 방해물에 부딪혀 반향이 되더라도
자신이 한 말이나 그대로 되받을 뿐이라 해도
그 메아리도 특권이야

열심히 올라가 본 사람의
크게 소리 질러 본 사람의
--- 「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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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별의 첫 시집 『네 시를 읽는 오후 네 시』는 ‘어떤 기분들’에 관한 기록이다. 그 기록은 ‘시(詩)’와 ‘시(時)’를 한꺼번에 가로지르는 자기 고백적 ‘실어(失語)’에 가까운 언술이기도 하다. 시인이 직시하듯 “어떤 언어들은 그 자체로 시”라는 주어로 자주 환치되면서, “다수결로 해결할 수 없”는 일상의 무용한 말들을 자기 고백의 프리즘 속으로 성심성의껏 불러 세운다. 특히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꿈’과 ‘비’에 관한 굴절은 시인의 오랜 기억을 조향하면서, “눈을 뜬 채로도 꿈과 현실을 가름할 수 없”는 대화의 웅―웅거림과 고백의 ‘환청’ 속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러니 “물고기와 새가 거의 똑같이 생겼”다고 말해도, ‘시’와 ‘비’를 동의어로 읽는다고 해도, ()와 0를 오독한다고 하여도, 오히려 그로 인해 ‘네 시를 읽는 오후 네 시’의 초대장은 오래도록 유효할 것이다. “아무리 가볍게 말하고 웃어도 무엇 하나 휘발되지 않는” 신의 귀띔 같은 내어(內語)가 이 시집에 담긴 시적 열망을 온전히 증명하고도 남을 테니 말이다.
- 김정배 (문학평론가, 원광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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