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내가 뭔가 온전히 내 생각만으로 선택해본 게 있나 싶다. 수능 배치표가 가리키는 대로 대학을 정했고, 친구들이 다 가고 싶어 하기에 은행에 취업했다. 20대에 서울대 다니는 남자를 만난 건 엄마가 시켜서였고, 30대에 부자 남자를 찾은 건 회사가 나를 내몰았기 때문이다. 뉴스가 연일 비타민의 중요성을 떠들지 않았다면 비타민 주사 따위 쳐다도 보지 않았을 것이다. 난 늘 떠밀리고, 강요당하고, 강력한 지침에 맞닥뜨려야 했다. 진짜 내 맘대로 선택한 건, 그날 밤 술에 취해 택시에서 내린 것뿐이었다. 그 결과는 바퀴벌레와의 동침이다. 고로, 나는 선택을 하면 안 되는 인간이다. --- p.91
하지만 세상은 달랐다. 정도를 걸으면서 성공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라고? 그럼 백번 양보해서, 적어도 나는 그랬다. 나는 정도를 걸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제 곧 30대 중반인데 지금껏 이 모양이면 앞으로도 이렇다고 보는 게 맞다. 아니, 더 나빠질 것이다. 세상은 ‘아파트서 자는 자’와 ‘길에서 자는 자’, 딱 두 부류로 나뉜다. 하물며 ‘길에서 자는 자’ 수가 점차 늘고만 있다. 그런데 나는 아직 완전한 아파트 주민이 되지 못했다. 자칫 방심하면 아무나 잡아먹겠다고 돌아다니다 눈알을 뽑히는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 생각만 해도 오금이 저리다.
(…)
만에 하나 이 아파트에서 쫓겨나고 강남으로 넘어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아예 없진 않을 것이다. 밖에는 아직도 많은 시위대가 있다. 그들도 살아 있다. 길에서 잔다고 해서 행복하지 않을까? 아파트에서 산다고 그들보다 행복할까? 쓴웃음이 나온다. 잠깐이나마 이런 헛생각을 하는 건 모두 베스트셀러의 세뇌 때문이다. 버리고 행복하라, 같은. 정작 저자 본인은 하나도 안 버리면서 쓰는 책들.
못 가질 수는 있다. 안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비교 대상이 생기면 얘기는 달라진다. 같이 못 가질 수 있다. 같이 안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나혼자 덜 가질 수는 없다. 적어도 남들만큼은 가지고 살아야 했다. --- p.224~225
한국에서 회사 생활을 10년 가까이 했다는 것은 신념이나 가치관을 수시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사가 바뀔 때마다, 회사 정책이 바뀔 때마다, 부서가 바뀔 때마다 나는 리셋을 반복했다. 실적이 목숨이다 그러면 고객 뒤통수라도 쳤고, 친절이 1순위다 그러면 그 고객 밑에 기다시피 했다. 모든 직원이 패밀리다 그러면 쉬는 날 열리는 동료 아들 돌잔치에도 진심으로 신나서 참석했으며, 능력 제일주의다 그러면 그 동료의 흠을 찾기 위해 두 귀를 쫑긋 세웠다.
어쩌면 그 이전부터일지도 모른다. 나의 장래 희망은 면접을 볼 때마다 바뀌었다. 회사의 사훈에 따라 내 성격, 경력, 좌우명도 바꿔댔다. 내가 쓴 자소서들에는 스무 개가 훌쩍 넘는 내 자아가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모두 유다영이었고, 어떤 면에서는 그 누구도 유다영이 아니었다.
--- p.229~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