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원이 되는 것에 성공했다. 수습 기간 17개월 만의 일이었다. 실패 같은 구석이 있는 성공이었다.
--- p.12
병원에서 알려준 병명은 적응장애였다. 내 느낌으로 풀어보면, ‘어떤 형태의 갑질도 감내할 수 없는 사람’이다. 대학원에는 교수가, 직장에는 상사가 있었다.
--- p.15
이 싸움은 누구보다도 나 자신을 위한 것이지만, 내가 그들에게 이 소송을 잘 이겨보여서 정면으로 부딪쳐볼 수 없었던 그들도 과거의 자신과 화해할 수 있기를 기도해본다. (…) 그 어느 때보다도 생의 한가운데를 올바로 걷고 있다는 긍지를 가지고 산다. 실망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하는 용기도 잃지 않았다. 이거면 충분하지 않은가. 나는 잘 지내고 있다. 싸움을 시작했지만 나는, 아니 싸움을 시작했기 때문에 나는, 잘 지내고 있다.
--- p.25
우리가 본의 아니게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을 때 매트리스가 없을 것이라는 공포는 우리를 구석으로, 구석으로 더 더 밀어붙인다. 매트리스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있을 때도 없을 것이라고 믿고, 없을 때도 없을 것이라고 믿는 게 습관이 되어, 나뭇가지에 맹독이 있는 줄도 모르고 나뭇가지를 부여잡고 손이 썩는 것을 견디며 버티곤 한다.
--- p.53
인터넷을 끊었다. 핸드폰 데이터로만 살고 있다. 무기력과의 전쟁을 선포하며 취한 특단의 조치 중 하나다. (…) 책을 좀 읽겠지, 하는 마음으로. 그러나 아니었다. 그냥 영상 콘텐츠 소비마저 관둔 무기력한 사람이 되었다.
--- p.74
함께 독서회를 하는 친구가 자신의 탈코르셋 기준에 대해 인상 깊은 말을 남겼다. “삼성 이재용이 한다고 생각했을 때 이상하면 나도 안 해요.”
--- p.113
대부분의 립스틱과 아이섀도를 버렸지만, 멋과 분위기를 내는 것까지 모두 다 부정하진 않는다. 만 명의 탈코르셋 운동가가 있다면 아마 탈코르셋의 방식도 만 가지가 될 것이다.
--- p.114
사랑보다 더 넓고 깊은 감정, 또는 생존에 더 실리적인 지혜를 발견하고, 긴 여정을 함께할 연대자들을 찾아 제도의 인정을 받아내고 싶다.
--- p.121
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이 가해자와 싸우는 과정에서 엄청난 죄책감과도 싸운다. 피해자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부모님께만큼은 죄책감을 느끼지 않기가 어렵다.
--- p.148
내 바늘 같은 마음에 내가 찔렸다. 피해자 탁수정이 연대자 탁수정을 죽으라고, 죽어버리라고 공격하는 낮과 밤이 계속되었다.
--- p.189
연대는 일 하나하나가 다 만만치 않다. 피해자 한 명 한 명의 우주가 다 다르다. 본인도 다 모를 만큼 넓고 복잡하다. 상황이 주는 감정의 진폭도 무시할 수 없다. 이런저런 신체적 정신적 문제까지 동반되는 경우도 많다. 법은 피해자 편이 아니고, 거기다 금전 문제까지 더해진다.
--- p.189
이 경이와 슬픔에 어떤 이름을 붙이면 맞춤할까. 어쩌다 보니 9,550년 동안이나 이겨내게 된 바람과 비, 습도, 나쁜 공기, 미운 벌레, 원치 않는 새가 짓는 집, 더 가까이에서 맡아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어떤 꽃 냄새…… 목마름…… 고독이라거나 어쩌면 그만 살고 싶은 마음이라거나. 그런 모든 것들을 9,550년 동안 뿌리내려진 곳에서 겪으며 산 나무가 나에게 건네는 이 난감하고 한편으론 또 반가운 선물 같은 기분을 뭐라 부르면 좋을까.
--- p.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