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의 위기’에서 ‘의미의 자리’로 향하는 이행을 생각하며 줄곧 글을 썼다는 사실을 내가 깨닫게 된 것은, 어떤 이유로, 십여 년 전에 출간된 김인환의 비평집 『의미의 위기』와 ‘부정성’의 정신을 가르쳐 준 아도르노의 문예비평을 다시 펼쳐 보았을 때었다. 시는 매우 ‘주관적인’ 방식으로 우리가 마주하게 될 의미 생성의 흔적들이 집결한 장소이며, 따라서 ‘형식’의 반대편에 ‘의미’를 가두어 놓은 이분법 저 너머 어딘가로 우리를 초대한다. ‘의미’는 구조주의가 제 그림자를 차츰 걷어 낼 무렵에조차 기이하게도 늘 ‘형식’의 짝패처럼 인식되었다. 그러니까 ‘의미’는 반절짜리 세계에 갇혀, 가령, ‘내용’, ‘기저’, ‘뜻’ 등과 같은 것으로 여겨지거나 아직도 글의 ‘알맹이’ 를 대표해 주는 수사로 쓰이곤 한다. 그러나 시는 어떤 경우에도, 그러니까 의미를 지워 내려는 시도나 의미 생성의 경로를 낱낱이 파헤치고자 하는 시조차도 ‘의미’를 저버릴 수 없다. 이러한 과정 자체가 벌써 ‘의미’의 자리를 타진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의미’는 항상 근사치의 의미, 따라서 항상 자신의 자리를 타진하는 의미인 것이다.
---「책머리」중에서
그렇다. 텍스트는 텍스트마다 고유한 리듬이 있으며, 이 고유한 리듬을 발견하는 일이 시의 특수성을 조명하는 일과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없다. 산문시는, 이와 같은, 그러니까 텍스트가 발견해야 할 의미의 단위를 매 순간, 비평의 대상으로 전환해 낼 줄 안다는 특징도 지닌다. 최근의 시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바로, 글의 형식과 의미가 서로 무관한 상태에서 작동하지 않는다는 어떤 테제, 그러니까 글의 형식에 대한 고안이 바로 의미의 고안이라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다는 점이다. 매번의 시가, 매번의 텍스트가 발견해야 할, 매번의 텍스트에 고유한 저 ‘의미-형식’은, 주제와 문장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고지하는 동시에, 시를 형식이라는 굴레와 요약되는 주제에서, 이해와 포착의 대상으로부터 해방해야 한다는 노력의 소산이다. 상징이 어느 한 시대, 시의 주된 흐름이었던 것처럼, 짧은 글에, 운문 속에 영롱하게 고여 진정한 감동을 부여하려 했던, 그렇게 서정의 화신이자 메카였던 시가, 이제, 사유의 고안과 고유한 방식의 배치를 통한, 현실에로의 탐구로 향하는 것으로 보인다. 운문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 없다거나, 운문의 고유성이 사라졌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다양한 산문시나 아주 긴 시(김동환의 서사시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아주 길다 할 시, 정말 긴 시, 요즘 들어 부쩍 그 출현이 늘어난, 그런 시 역시, 시인 것이다. 이 모두 삶의 양식과 사유의 반영이며, 생각의 산출이자 실천이며, 발명 자체이기 때문이다. --- p.9~50
시는 항상 근사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최대한 말의 잠재력을 흔들어 깨운다. 낱말과 통사, 문장은 자주 고정된 의미를 뚫고, 관계의 망에서 고유한 가치를 타진하고 자신의 터를 다진다. 시와 번역은, 이와 같은 사실을 자명하게 드러내며 의미의 자리를 타진한다. 시는 근사치의 비유로 발화의 경제성을 실현한다. 시와 번역은 한 입으로, 결국 두 마디 이상을 말을 쏘아 올린다. --- p.98
시는 언어의 가장 깊숙한 곳을 움켜쥔다. 시는 모국어-개별 언어를 넘어선 언어를 향해 뻗어 나가거나, 하나의 개별 언어가 또 다른 개별 언어들과 공유하고 또 협조하는, 가장 보편적인 곳으로 치솟아, 말의 가능성 자체를 확장시키는 일에 까닭 모를 열정으로 몰두한다. ‘모국어의 외국어성’에로의 접근을 허용하는 발화라고 부를 시의 이러한 특성은, 시가, 근본적으로, 모호성을 끌어안고, 복수성의 체계 속에서 우리의 삶을 재현하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시는 폭력적이다. 이렇게 언표의 수준에 머물지 않고, 주관적인 발화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하여 종종 당혹감을 풀어놓는다는 점에서 시는 폭력적이다. 시는 아무도 묻지 않고 지나치는, 지나치려는 논리에 자주 시비를 거는 말을 생산한다는 점에서 폭력적이다. 시는 묻지 않으려고 한 것들, 묻지 말라 한 것들, 질서 속에 안착한 사유에 대한 비판적인 순간들을 잠시 고지하는, 정확한 발화를 기획하고 시도한다는 점에서 폭력적이다. 민주주의라는 허상을 비판의 장으로 자주 소급하려 한다는 점에서도 시는 폭력적이다. 평등, 공정한 분배, 1/n의 자유, 그 합의와 계산, 더하고 빼기 속에서 인간을 조각내고, 동일한 유니폼을 입혀 재배치하는 정치적 시도와 이데올로기의 발현 위로, 저 팸플릿 속, 가지런히 늘어선 주의와 주장을 가로지르며, 그 위로, 차이와 관계에 기초한 상호적이고 주관적인 사유를 무시로 흩뿌린다는 점에서, 시는 근본적으로 폭력적이며, 치명적이고, 비판적인 발화이다.
--- p.46~6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