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인 날. 신데렐라적 전환의 시대를 여는 첫날이 밝았다. 부패, 불평등, 오염 같은 더러움이 이제 더는 더럽지 않게 느껴진 것도 우리가 동화 속 신데렐라처럼 선택받았다는, 곧 경계를 넘어서리라는 기쁨 때문이었다. 전 세계 모든 방송은 기도하는 손의 모양을 닮은 우주선의 웅장한 자태를 보여주며, 지난 15년간 2만 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우주인의 자격을 얻은 16명의 긴장되고 결의에 찬 표정 따위의 일거수일투족을 생중계했다.
“인류는 이제 관대함을 배워야 할 때입니다.” 중계를 맡은 아나운서의 입에서 우리의 야심이 흘러나왔다.
---「프롤로그」 중에서
그리고 220년이 지났다.
인류는 환생했고, 문명은 쇠락했으며, 한계는 우리 곁에 있었다.
---「프롤로그」 중에서
광대뼈가 튀어나온 각진 얼굴형에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이 남자로 말하자면, 〈2번째 주인의 자유와 지위 보장에 관한 법률〉의 제정에 결정적인 이바지를 한 위대한 선구자로, 혁명가, 인도자, 구세주, 허깨비 왕으로 불리는 무려 138세 먹은 남자였다. 혹자는 그를 아버지라 불렀다.
---「허깨비 왕」 중에서
허깨비의 탄생을 통해 또 다른 나를 만나보고 싶었어요. 환생을 통해 20세의 몸으로 돌아간다고는 하지만, 나는 내가 눈 감고 코 막아도 원래 알고 있던 나였고, 내 삶의 규칙이나 습관 같은 것은 쭉 같았어요. 신선하고 역동적인 활력으로도 나를 바꿔놓지는 못했어요. 나를 반쯤 놓치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녀를 깨우고 싶었고요. 함께 왈츠를 배우고, 마주 앉아 식사하고, 책을 나눠 읽고, 부둥켜안은 채 잠드는 거죠. 그리고 일기장을 공유하는 거예요. 첫 문장은 내가 쓰고 다음 문장은 그녀가 쓰는 식으로. 우린 긴 글을 써내려갈 거고, 죽는 그 날에 이르기까지 이야기를 끝맺지 못하게 할 거예요.
---「기대」 중에서
“이름이 다 그렇지 않을까? 한심하고 여리며 충동적인.” 칠은 어깨를 으쓱했다. “영원을 추측하려는 개별성의 그릇에 담긴 한계일 테니까.”
“자네가 찾으려는 7개의 이름도 그분의 이름처럼, 어쩌면 그분의 이름보다 더 별거 없을 거라는 쪽으로 받아들여도 되겠나?”
---「그늘에 쉬어」 중에서
술은 이런 것이다. 마시고, 건배하고, 마시고, 코를 풀고, 마시고, 오줌을 누고 돌아와, 마시고, 아몬드나 땅콩 따위를 씹고, 마시고, 히죽 웃고, 마시고, 큰 소리로 주문하고, 마시고, 방귀를 뀌고, 마시고, 허세를 부리고, 마시고, 허리를 펴고, 마시고, 빈 병을 가지런히 놓고, 마시고 또 마시고 …… .
---「수지」 중에서
“그러한 기대와 상상에 한계는 없지만, 결과적으로 한계에 맞닥트릴 수밖에 없는 게 엄연한 현실이긴 하네. 그게 현재고. 인간이 이래. 영원에 가까운 어떤 불가능한 수준을 책정하고, 거기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받아들이는 거지. 그래서 이 세계가 함정에 빠진 거고.”
“지독하게도 오만했어.”
---「칠」 중에서
어째서 우리가 저 띠를 넘지 못하는지 짐작하나? 우리 안의 의도와 욕망을 분석하고, 온갖 방정식에 대입해 계산을 마치고, 통계적으로 낱낱이 해체했음에도, 어떻게 된 게 우리는 서로를 의심하지. 그리고 그 의심에 관한 염려를 우리는 도저히 끊을 수 없지. 그리고 이는 설명할 수 없네. 하지만 폭탄은 달라. 그건 입력해놓은 수치에 맞는 위력을 드러낼 뿐이거든. 한마디로 말해서 빤하다는 거지.
---「달」 중에서
준은 자신이 지은 이름이 누군가에게 의미심장하게 작용한다는 것에 대해 으스대지 않은 채 노회한 신사처럼 예의가 발랐다. 200년 넘는 시간이 한 남자를 잘 다듬은 것 같았다.
---「차 마시는 남자」 중에서
이걸 어떻게 설명하는 게 좋을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팔목에 둘렀던 전자 종이를 판판하게 펴서 거기에 이제껏 경험한 여러 목소리를 이야기 형식으로 적은 글을 보게 되었어. 아아, 정말 짜릿했지. 이걸 역사라 해도 좋고, 소설이나 수필이라고 해도 상관없어. 어떻게 불리든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정말 중요한 건, 나를 흥분시키는 건, 무한하게 확장된 그 세계가 시나브로 내 안에 들어갈 크기로 점점 줄어든다는 거야. 더 작고, 더 투명하게. 그렇게 하나의 점이 된 그것에, 드디어 이름을 붙이는 거지. 누구도 아닌, 바로 내 이름을.
---「에필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