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편지하다
컨텐츠팀 최지혜(sabeenut@yes24.com)
2009-11-04
말은 나오는 순간 허공에서 부서지지만 글은 처음 그 모습으로 영원하다. 글은 말보다 조심스럽고, 무겁고, 그 차이만큼의 진심이 더해진다고 믿는다. 보고 싶을 때마다 꺼내 볼 수 있고, 품에 안고 싶다면 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편지가 좋다. 그러니까, 그건 하나의 '실체'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감정을 보여주는, 혹은 볼 수 있는 실질적인 물체.
더이상 편지를 쓰지 않는다는 말은 누군가에게 그만큼의 시간을 들이지 않겠다는 말과 어쩐지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다. 아무도 편지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래서, 사람을 조금 서글프게 만든다. 색이 드러나고 향이 우러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마저 증발해버린 느낌이다.
주인공은 눈이 먼 개 와조와 3년째 여행 중이다. 매일 밤 다른 모텔에 묵으며, 여행 중에 만났던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한다. 여행을 자유라고 생각하는 주인공은 여행지에서 사진을 찍지 않는다. 작은 기념품조차 사지 않는다.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서 건져올린 작은 감정의 조각조각들을 꿰어 하나의 편지로 완성하는 것만이 이 여행의 목적이다.
편의점의 상징은 컵라면이라고 주장하는 56, 헤어진 여자친구와의 오해를 풀기 위해 기차 이동 판매원이 된 109, 고속버스에서 만났다가 갑자기 사라진 412, 그리고 둘이 뭔가를 함께 한다는 게 꽤 괜찮다는 걸 알게 해준 751. 주인공은 기억하기 쉽고 끝이 없다는 이유로 여행하면서 만난 사람들에게 번호를 부여한다. 물론, 편지하기 위해 주소를 물어본 사람들에 한해.
이들에게 쓴 편지에 대한 답장을 받으면 그의 여행은 끝이 난다. 하지만, 매일 아침 우편함을 대신 확인하고 온 친구를 통해 듣는 말은, "아무도 편지하지 않았다"는 말 뿐. 언제쯤 그의 여행은 끝날 수 있을까? 결국엔, 주인공의 개 와조가 너무 병들고 아파서 더 이상 여행을 계속할 수 없게 되지만.
편지를 쓰지 않게 된 정확한 계기와 시기는 기억나지 않는다. 순전히 문명의 이기에게만 그 탓을 돌리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편지를 쓰던 그 때의 나와 편지를 쓰지 않는 지금의 나. 그 둘 사이의 거리는 얼만큼일까?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어딘가에서 편지를 쓴다, 는 말처럼 고리타분하고 어색한 말도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외롭고 더 외로워지는 이유는 어느 순간 편지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일기는 독점되는 것이지만 편지는 공유되는 것, 또한, 일기는 홀로 보관하는 것이지만 편지는 둘 이상이 보관하는 것이라는 작가의 말처럼. 모두가 편지하던 시절에는 서로를 향한 온전한 시간과 정성과 기다림이 있었기에, 그 모든 것들을 함께 만들어 냈기에, 삶이 지금보다 조금은 더 따뜻한 게 아니었을까.
그래서 오늘 나는 편지를 쓰려 한다. 그만을 위한 시간을 따로 마련해, 그 시간 만큼은 그를 위해 온전한 마음을 쏟아내려 한다. 그것은 우리를 위한 것 이전에 그를 위한 것이고, 또한 나를 위한 것이다.
아무도 편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너에게 편지한다.
웅얼대듯 '편지한다'는 말을 입 밖에 내는 순간, 알 수 없는 행복감이 밀려든다.
오늘, 편지하면 어떨까?
'꼭 편지할게요 내일 또 만나지만'라는 노래 가사처럼.
나를 위해, 너를 위해, 또한 우리 모두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