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안다. 써야 할 원고를 앞에 두고 10분에 한 번씩 자리에서 일어나 집 안을 휘적휘적 걸어 다니는 것도, 금세 피로를 느껴 침대에 드러누워 버리는 것도, 모두 내 정신력이 약해서라는 걸. 그리고 정신력은 체력에서 온다는 걸. 하지만 아무리 숨을 고르고, 운동화를 고쳐 신어 봐도, 나는 달리기가 싫다.
아무래도 내가 달리는 작가가 될 일은 없을 것 같다. 대신 정신력이 약한 사람 중에 가장 오래 걷는 작가가 되어 보려 한다. 산책하듯 주변을 둘러보며 설렁설렁 걷다가 별안간 불어오는 비바람에 홀딱 젖기도 하고, 힘들면 주저앉아 맥주도 한잔 마시면서 그렇게 오래 걷는 작가 말이다.
--- 「무리하지 않고, 오래오래 나약한 채로 + [걷기왕]」 중에서
길치인 데다 겁도 많은 나는 길 한가운데서 자주 불안해진다. 이 길이 맞는지, 이 방향으로 걸어가면 어디에 도착하는지를 도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문과 대신 이과를 선택했을 때나 화학과에 입학했을 때, 부푼 꿈을 안고 베를린행 비행기에 올랐을 때도 5년 뒤에 내가 여기에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다시 생각해 보면 어떤 길로 걸어가든 내가 예상했던 목적지로 데려다주는 내비게이션은 애초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숙소만 옮기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고 믿었던 타에코가 다시 하마다 민박으로 되돌아온 것처럼, 2분 뒤에 뭐가 나올지는 가봐야만 알 수 있으니 불안하고 의심이 들어도 계속 걸어갈 수밖에 없다. 조금만 참고 가면 기대했든 기대하지 않았든 목적지가 나타날 테니까.
--- 「뭐가 나올지는 가봐야만 알 수 있으니까 + [안경]」 중에서
슬럼프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마다 ‘열심히 하고 있을 때 슬럼프는 더 자주 찾아온다’는 혜은의 말을 곱씹어 본다. 이 말대로라면 나는 현재 내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
결국엔 키키도 마법을 되찾는다. 검정 원피스 따위는 이제 아무렇지 않다는 듯, 낡고 더러운 청소용 빗자루를 타고도 훨훨 날아다닌다.
그리고 나는 존재감과 상관없이 불쑥불쑥 삐져나오는 보풀 같은 마음을 제거하기 위해, 매일 일기를 쓰기로 했다. 아무래도 이렇게 사는 한 맘 놓고 원피스 한 벌 구입하긴 힘들 것 같으니, 새 옷을 사는 대신 혜은처럼 매일 쓰는 사람이 되기 위해!
--- 「불쑥 삐져나오는 보풀 같은 마음 + [마녀 배달부 키키]」 중에서
내가 위로에 서툰 건, 어쩌면 내가 슬픔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고민이나 슬픔을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대신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슬픔을 공유하면 기분은 얼마간 해소될 수 있지만 상황 자체가 변하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모든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기에, 공연히 위로받으려 애쓰지 않는다.
그 애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를 위로하는 글을 쓰기에 나는 무심하고 무뚝뚝한 사람이다. 무조건적인 긍정이나 근거 없는 무책임한 응원의 말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으니까.
다만 나는 잠자코 들어주는 편을 택한다. 참견도, 조언도, 섣부른 위로도 없는, 하지만 부르면 들릴 정도의 적당한 거리에서 무심히 있어 주려 한다.
--- 「냉침 밀크티 같은 사람 + [인사이드 아웃]」 중에서
내가 쓴 글이 하나둘 늘어날수록, 몇 번이고 퇴고를 반복할수록 이전보다 나아질 거라는 걸 나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성장이라는 게 꼭 위를 향할 필요는 없으니까. [원펀맨]에 등장하는 수많은 C급 영웅들처럼 옆으로 넓어지거나, 깊어지는 것, 없던 마음(용기)이 생겨나거나, 있던 감정(두려움)을 떨쳐버리는 것도 분명 성장일 것이다.
그러니 조급해하지 말고 기다려보기로 한다. 가까스로 오른 게 겨우 한 계단일지라도, 어차피 나는 두 계단을 한 번에 오르지 못하는 사람이니까. 조금씩, 조금씩 성장할 나의 모습을.
--- 「인생에도 치트키가 있다면 + [원펀맨]」 중에서